물방울 속에 비친 詩人의 내면… 신영배 시집 ‘물 속의 피아노’

입력 2013-09-12 17:56


시인 신영배(41·사진)의 세 번째 시집 ‘물속의 피아노’(문학과지성사)를 펼치면서 드는 생각은 이 시집을 쥐어짜면 어느 정도의 물이 나올까, 라는 좀 어처구니없는 상상이다. 시집 전체가 온통 물에 대한 사유와 몽상으로 짜여져 있다. 그런데 쥐어짜보면 기대했던 물은 나오지 않고 민감하기 짝이 없는 여성의 감정들만 삐죽 빠져나올 것만 같다.

“집 안에서 여자는 식탁을 차린다 손끝에 물방울을 달고// 물방울이 흔들린다 물로 어떤 것은 가능하고 어떤 것은 가능하지 않다 불안과 부끄러움이 손끝에 매달려 있다// (중략)// 물병이 쓰러진다 젖은 다리로 바닥을 긴다// 손으로 눈가를 훔친다 물방울이 부푼다”(‘물방울 알레그로’ 부분)

물방울 안에 여자의 불안과 부끄러움이 녹아 있다. 물이 여자의 감정을 대체하고 있다. 세상에서 물만큼 인간의 감정을 담기에 유연한 물질은 없다.

“바닥에 물자국이 놓여 있다 그녀가 가만히 디뎌본다 물로 걸어가본다 물로 뛰어가본다 동시에 물로 돌아온다”(‘물구두’ 부분)

이상한 것은 ‘디뎌본다’ ‘걸어가본다’ ‘뛰어가본다’ ‘돌아온다’라는 동사의 주체에서 직접적으로 느끼는 감정 상태가 ‘물’이라는 무정형의 본질에 의해 간접화되면서 그 감정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간접화 방법이야말로 자신의 감정이나 심리를 직접 드러내고 싶지 않는 시인의 전략이다. 물은 시적 자아의 감정을 담아내는 동시에 그 감정을 중성화시킨다.

“여기서 울고 저 멀리 가서 듣다// 도레,/ 온몸이 붇도록/ 물을 만지는 여인들/ 미파, 꽃들을 따라 멀리 간다// 나는 두 귀가 없이// (중략)// 떨다, 흐르다// 꽃의 음정// 여기서 울고/ 나는 아주 멀리 가야 하네”(‘물 피아노’ 부분)

시인은 감정의 중성화에서 한 발 더 나아가 88개의 건반으로 이루어진 88개의 감정 덩어리, 피아노를 아예 물 속에 넣어버리고 만다. 물속의 피아노라니. 물속에서 소리는 전달되지 않는다. 그건 세상에는 없는 소리. 무음의 음향으로 감정의 다양한 연주를 시작하겠다는 시인의 내면을 반영한다. 물속으로 퍼져나가는 소리 없는 연주. ‘물 피아노’ 앞에 신영배가 앉아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