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CEO들 ‘정치사업’으로 변질된 인문학
입력 2013-09-12 18:35
절망의 인문학/오창은/이매진
한국 사회의 인문학적 빈곤을 우려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인문학 열풍’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몇 년 새 대중의 인문학 열기는 과열되다 못해 변질되기 시작했다. 반면 우리 사회의 인문학적 토대를 제공해야 할 상아탑의 인문학 위기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이렇듯 한국 사회의 인문학은 모순에 빠졌다.
스스로를 ‘실천 인문학과 시민 인문학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반(半) 제도비평가’라 소개하는 중앙대 교양학부 오창은 교수가 현장 목소리를 중심으로 한국 인문학의 절망적 상황을 진단한다. 2001년부터 문제의식을 갖고 대학 안팎을 넘나들며 만난 52명의 인터뷰를 토대로 풀어간다.
저자는 인문학의 위기를 인문학의 분절화(내재적 측면), 대학의 식민지화(사회적 측면과 역사적 측면), 국가 기구의 관리 시스템(제도적 측면) 문제가 상호 긴밀하게 옥죄면서 파생된 산물이라고 분석한다. 먼저 인문학 열풍의 이면을 파헤친다.
교양 있는 삶을 향한 대중의 욕망에 가장 발 빠르게 반응하고 있는 것은 지방자치단체다. 최고경영자(CEO) 등 자본의 최상위층도 무섭게 반응했다. 저자는 서울대의 CEO 인문학 최고위 과정을 예로 들며 “인문학 강좌가 자율적이면서 정치적인 주체 형성이 아니라 지지층 확대를 위한 정치 사업으로 변질되는 양상마저 띠고 있다”(27쪽)고 지적한다. “인문학이 시장의 영역에 포섭되면서 말랑말랑한 교양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문학평론가 이명원의 목소리는 날카롭다.
대학 내부의 현실을 고발하는 목소리는 좀 더 신랄하다. 도제 관계로 형성된 지도 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는 여전히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사제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인문학 연구를 위한 기초 환경 조성조차 이루지 못하고 있다.
W씨는 석사에서 박사 과정으로 진학하는데 영문도 모르는 채 1년 반을 허비했다. ‘교수에게 몸 대주고 학위 졸업장만 받는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해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사회로 진출한 J씨는 이렇게 말한다. “대학원생이 세미나 발표를 준비해오면 교수가 이것저것 물어봐요. 교수가 젊은 연구자에게 최근 학문 동향을 배우는 거죠. 말이야 공동 세미나지만 대학원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대학원생이 교수를 가르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번역과 해외 유학으로 시선을 돌려 학문의 종속성 문제를 진단한다. 학문적 글쓰기에 대한 기본 교육이 부족해 ‘한국 학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 부재한 현실, 결국 해외 담론을 소비하는 수준에 멈추고 있는 학문 시스템을 고발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연구재단으로 대표되는 국가 기구의 학문 지원 시스템에 대해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등재 학술지 제도와 한국 학술지 인용 색인 제도, 기초 연구지원사업 등이 성장주의와 양적 팽창을 목표로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인문학의 위기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연구재단이 조직을 일원화해 국가가 더 수월하게 학문을 관리하려 한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학문후속세대와 교수, 대학 사회는 국가의 모든 학문 개입에 더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231쪽)
절망(絶望)의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학의 본령을 지키는 희망의 인문학을 절망(切望)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와 어우러져 인문학 위기의 본질에 대한 사유를 돕는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