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희성] 잃어버린 문고판에 대하여

입력 2013-09-12 17:51


작년 이맘때 대학원 후배에게서 깜짝 선물을 받았다. 신기하게 생긴 책갈피와 귀여운 손글씨의 편지, 그리고 세 권의 소설책. 덕분에 최명희의 ‘혼불’ 이후 생긴 소설기피증을 이겨내고 정말 오랜만에 책장을 넘기며 밤을 지새웠더랬다. 생각난 김에 도쿄에서 유학 중인 후배의 페이스북을 들여다봤다. 요 며칠 새로 나온 책 이야기로 가득한 것이 책이 고픈 모양이었다. 워낙 책이 많은 친구라 감히 책 선물을 돌려줄 생각을 못했는데 얼른 보내줘야지. 상자를 열어보고 좋아서 비명을 지를 후배를 생각하니 덩달아 신이 났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후배의 희망도서 중 여섯 권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총액 약 12만원. 게다가 한 권만 빼고 모두 양장본! 무게 당 국제우편요금을 더하면 적지 않은 출혈이 예상됐다. 사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죄 없는 모니터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자니 궁색한 변명 같은 화풀이가 튀어나왔다. “왜 다 크고 무겁고 비싼 거냐고.”

우리나라 책값이 싼 편이라고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일본어판을 예로 들어보자. 요즘은 동시에 출간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비싼 양장본이 먼저 나와 빨리 보고 싶거나 소장본을 원하는 독자들에게 간다. 그리고 시간차를 두고 저가의 구매 기회를 기다리는 독자들을 위한 문고판이 출판된다. 미국, 유럽에서도 이러한 가격 차별화로 더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전하고 있다.

같은 소설, 다른 가격, 같은 감동. 이 좋은 것을 왜 우린 누릴 수 없을까? 문고판이나 페이퍼백은 안 팔린다? 독자들은 예쁜 책을 원한다? 정말 그럴까? 일단 하루키의 소설부터 문고판으로 내보고 얘기하자. 최근 문고판이 부활하고 있다지만 인문·교양·실용서적들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성의 문제, 다양성의 문제다. 자크 라캉, 행성의 궤도, 언어의 기원 같은 책들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다. 왜 다른 책들은 문고판을 내지 않는가 하는 얘기다.

문고판의 대명사 펭귄북스를 만든 알렌 레인은 대중성과 교양서의 균형 유지가 성공 비결이라고 말했다. 그의 작은 책은 전쟁터에서도 읽혔으며 지금까지 2500여종이나 출간됐다. 1935년 나온 첫 펭귄 시리즈는 아가사 크리스티,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 모음집이었다. 이 가을, 작가 조정래와 파울로 코엘료의 신작들을 문고판으로도 만나게 해 달라면 무리일까? 이 욕심을 채워줄 출판사가 하루 빨리 나와주길 바랄 뿐이다.

김희성(일본어 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