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이동훈] 함께 일그러진 우리
입력 2013-09-11 17:44
국민학교 시절 집안 달력은 늘 박정희 대통령 달력이었다. 학교에서는 박 대통령이 선포한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해야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 나∼았다.’ 그래서 노래까지 등장했다. 여동생들은 참 잘도 따라 불렀다. 박 대통령 서거는 이런 일상이 무너져내리는 사건처럼 다가왔지만 시간이 지나자 전두환 대통령이 그 일상을 대신했다.
연희동 골목의 기억
1980년 동네 사람들은 우리 동네 사단장인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이 되었다며 좋아했다. 나 역시 겨울이면 육군 1사단 사령부가 바로 앞 논에 물을 대 운영하는 스케이트장에서 놀 수 있는 혜택을 본 터였는지 일기장에 ‘전두환 소장이 대통령 되다’라고 쓴 기억이 난다.
굳이 갖다 붙이자면 전두환 대통령과의 인연은 이른바 ‘뺑뺑이(추첨)’로 들어간 고등학교에서 재개됐다. 입학식 때 4∼5층밖에 안 되는 오래된 회색빛 학교 건물들과 달리 신축 교사가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대통령 아들이 다닌 뒤부터 지어진 건물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등하교 때마다 선글라스를 낀 아저씨들은 늘 교문 밖에서 서성거렸다. 우리 학교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각각 50명 이상 보내는 서울시내 입시 명문고로 자리잡은 것도 이 즈음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자 선배들은 자신들을 검정 교복과 빡빡머리(여성은 단발머리), 심지어 과외수업의 멍에로부터 해방시켜준 전 대통령을 배은망덕하게도 광주학살 주범, 타도의 대상으로 몰았다.
1995년 가을 경찰서를 출입하던 나는 비자금 사건이 터지자 연희동 노태우 전 대통령 집 앞에서 50여일간 붙박이 취재를 했다. 사저를 지키는 전경들은 평소에 회식비 한푼 안 주는 노 전 대통령을 노랭이, 구두쇠라고 욕했다. 노 전 대통령이 검찰로 달려가자 전두환 비자금 문제도 불거져 취재 장소를 길 건너 사저 골목으로 옮겨야 했다. 전 전 대통령 측은 노 전 대통령과는 달리 기자들을 위해 컵라면과 따뜻한 물도 갖다 놓았다. 전두환은 노태우보다 통 크고 의리가 있다는 말이 나왔다. 한 관할서 경찰관은 자제분이 전 전 대통령 손주가 다니는 명문 사립학교에 가게 됐다며 몹시 좋아했다. 5공화국 때 장관을 했던 사람들은 개각 때 청와대를 나오면서 금일봉에 적힌 숫자에 놀라 뒤를 돌아 목례를 한다는 식의 에피소드도 이때 나왔다.
보스 기질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뚝심이라고 해야 할까. 전 전 대통령은 검찰에 말없이 끌려간 노 전 대통령과 달리 2주일 뒤 골목에서 반박 성명을 발표했다. 이듬해 법원으로부터 무기징역과 2000억원대 추징금을 선고받고도 호기 넘치는 그의 배짱은 29만1000원밖에 없다는 답변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장남 재국씨가 추징금 전액 납부 계획을 발표한 10일. ‘독재타도 호헌철폐’ 시위가 한창이던 87년 읽었던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다시 뒤적였다. 담임선생님을 기만하면서 학급을 완전히 장악하고 우등생 행세를 하는 반장 엄석대. 그 밑에서 공포를 느끼면서도 적당히 복종하고 혜택을 누리는 반 아이들.
적당히 길들여진 건 아닐까
우리 사회도 12·12 신군부 쿠데타 이후 이런 카리스마에 길들여져 온 건 아닐까. 그래서 5·18 광주학살을 어정쩡하게 단죄해 놓고 잠재의식 속에는 늘 그 일그러진 영웅에 대한 경외심과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을까. 독재타도를 외친 학생회장 출신들이 국회에 입성한 지도 오래됐건만 16년이 지나서야 ‘전두환 추징법’이 만들어진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이제 와서 자신들이 만든 추징법 덕에 돈을 뱉어내게 했다고 자찬하는 야당의 구태를 그냥 봐줘야만 하는가. 박근혜 대통령의 ‘비정상의 정상화’ 조치가 있어야 추징이 되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국민들은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가.
이동훈 국제부장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