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임항] 구상나무
입력 2013-09-11 17:59
지리산 주능선을 2박3일 이상 종주하다 보면 한 차례 이상 비를 안 맞고 가기가 어렵다. 잠시 지나가는 비라면 별 문제가 없지만, 긴 시간 지속적으로 내리는 비에는 우비나 배낭커버는 무용지물이 되기 십상이다. 그럴 때 비를 피하기 좋은 곳 가운데 하나가 높고 큰 구상나무 밑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잎이 넓은 활엽수가 빗물을 더 잘 막아줄 것 같지만, 구상나무처럼 잎이 촘촘하게 난 침엽수가 빗물을 훨씬 더 많이 머금는다. 수년 전 지리산 우중 산행을 하던 중 반야봉 근처 구상나무 숲 속의 뽀송뽀송한 흙 위에 퍼질러 앉아 한동안 쉬었던 기억이 새롭다.
소나무과의 상록침엽교목인 구상나무는 우리나라 특산종이다. 18m까지 곧게 자라고 수형이 아름답다. 한라산, 지리산, 덕유산 등 단 세 곳의 해발 1000∼2000m사이에 자생한다. 구상나무는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간다는 주목처럼 죽고 나서도 오랜 세월 고사목으로서 늠름한 자태를 뽐낸다. 특히 겨울철 한라산 고지대에서 우렁우렁 상고대(나무서리)를 매단 구상나무 군락이 펼쳐내는 눈꽃터널은 겨울철 산행의 백미로 꼽힌다. 지리산 주능선의 구상나무 고사목 일부는 조각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구상나무는 장식용 크리스마스트리의 자재로 세계에서 가장 애용되고 있다. 1904년쯤 한 유럽 학자가 구상나무를 해외로 반출한 후 개량한 것이다. 그 학자가 미국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 ‘기준표본’을 제공한 탓에 그 재산권은 스미스소니언 측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특허 등록된 크리스마스트리용 개량종을 우리가 수입하려면 사용료를 물어야 한다.
구상나무 자생지는 기후변화 때문에 점점 줄고 있다. 산림청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는 수년에 걸쳐 한라산 구상나무의 25%가 고사한 것으로 추정했다. 연구소의 김찬수 박사는 “기후변화 중에서도 장기적 기온 상승보다 태풍, 폭우, 폭설 등 기후 극값의 변화가 구상나무 숲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산림청과 녹색연합이 9일 발표한 백두대간 생태지도에 따르면 지리산 제석봉의 구상나무 군락은 다행히도 건강한 모습이라고 한다.
구상나무, 주목, 가문비나무 등과 같은 아고산대 식물들은 산 정상부에 갇혀 있기 때문에 더 북쪽으로 씨앗을 퍼뜨려 북상하는 방식으로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가 없다. 산림청은 구상나무 ‘소멸 위험지’에 어린 나무를 심어 복원하는 한편 경쟁수종 제거 등 생육 환경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