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박강섭] 둔황석굴의 ‘주홍글씨’

입력 2013-09-11 17:59


중국은 매너 없는 자국 여행객에 대한 국제비난이 잇따르자 지난 5월 여행객이 지켜야 할 ‘문명여행 공약’을 발표했다. ‘문명여행 공약’은 함부로 유적이나 문화재를 만지지 말고 길거리에서 침이나 껌을 뱉거나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떠들거나 윗옷을 벗고 다니지 않도록 하고 줄서기 등 공공질서를 잘 지켜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또 각 민족의 종교와 관습을 존중하고 공공시설을 훼손하거나 장기점유하지 말고 호텔 물품을 손상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중국이 서둘러 ‘문명여행 공약’을 발표한 이유는 중국 관광객이 몇 년 전 이집트 룩소르 신전의 3500년 된 부조에 ‘○○○ 왔다 가다’고 낙서를 한 사건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여론의 뭇매를 맞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왕양 부총리는 “많은 국민이 외국 여행에 나서 세계 각국의 환영을 받고 있지만 일부 관광객의 수준이 낮아 비판을 받고 나라 이미지에도 손해를 끼치고 있어 영향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문화재 훼손은 복구가 어렵다는 점에서 중대한 범죄행위이다. 미국의 공격으로 사담 후세인 정부가 무너지던 2003년 4월 11일 이라크에서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일이 발생했다. 이라크 국민들에 의해 ‘인류문명사의 심장’으로 불리는 바그다드 국립박물관이 약탈당한 것이다. 서로 총까지 쏘아가며 약탈한 유물은 무려 1만5000여 점. 그중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인 함무라비 법전 서판도 포함되어 있었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그날을 이라크 고고학자들은 ‘이라크 문화 사망일’이라고 부른다.

전쟁 중에 문화재가 약탈당하고 유물이 훼손되는 것을 ‘반달리즘’이라고 한다. 5세기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이 로마에 침입해 유적을 파괴하고 유린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인류 역사를 보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반달리즘이 등장한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은 종교 유물은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2001년 3월에는 CNN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1500년 전에 만들어진 바미안 석불을 로켓포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 악명을 날렸다.

문제는 반달리즘이 전시가 아닌 평화 시에도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집트의 룩소르 신전 낙서사건처럼 관광객들에 의해 자행되는 ‘新반달리즘’이 그것이다. 해외여행이 늘어나면서 한국 여행객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문화재 훼손도 도를 넘어서고 있다. 세계 관광지를 여행하다 보면 문화재를 비롯한 시설물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한글로 남긴 사례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얼마 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세계 미술사의 보고로 불리는 중국 둔황의 모가오쿠(莫高窟·막고굴)를 찾았다. 벽화에 날카로운 못으로 긁은 홍위병의 낙서를 설명하던 중국 안내원에게 한국인의 낙서도 있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농담으로 물은 것이다. 그러자 중국 안내원은 기다렸다는 듯 한국인 관광객의 낙서를 보여줬다. 중국 송나라 시대의 화려한 벽화 위에 한글로 쓴 ‘○민정’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왜 지우지 않느냐고 묻자 낙서를 지우는 과정에서 문화재가 훼손될까봐 그대로 두고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한국인의 낙서문화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동해의 무릉계곡 등 심산유곡의 바위에는 어김없이 산천을 유람한 선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2년 전에는 국보 제147호인 울산의 천전리 각석에 낙서가 새겨지는 충격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경북 예천의 삼강주막 벽에도 분필과 매직으로 쓴 낙서가 빼곡하다. 룩소르 신전 낙서처럼 대부분 ‘○○○ 왔다 가다’는 내용이다.

문화재를 비롯해 명승지의 바위나 음식점 벽에 빼곡히 적혀있는 이름들. 그 낙서는 자신의 이름 석자를 빛낼 기념물이 아니라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주홍글씨일 따름이다. 매너 없는 여행객을 계도할 한국판 ‘문명여행 공약’이 필요한 시점이다.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