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혜훈 (9) 박사 학위후 남편과 생이별 중 ‘LA 대지진’이

입력 2013-09-11 17:25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매일 밤 잠들기 전 남은 인생의 계획을 다시 한번씩 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없이 인생의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큰 줄기들은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곳으로 흘러갔다. 경제학과를 간 것이 그랬고 정치를 시작한 것이 그랬고 영국행이 그랬다.

유학을 떠날 때만 해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들어가야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학위를 받고 나니 바로 한국에 돌아오는 것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좀더 경력을 쌓고 싶어졌다. 남편도, 나도 같은 도시의 직장을 알아보느라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남편은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에, 나는 미국 랜드연구소에 자리를 얻었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당분간 떨어져 지내며 방학에는 남편이 미국에 와 있기로 했다. 큰아들은 두 돌이 채 안 됐고, 둘째아들은 첫 돌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에 혼자 남아 두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 고난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국처럼 어린이집 승합차가 와서 아이를 데려가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곳이었고, 급할 때 잠깐이라도 아이를 맡아 줄 수 있는 친정이나 시댁의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로스앤젤레스에 큰 지진이 났다. 우리 골목 끝에 있던 7층짜리 건물이 무너졌다. 아파트는 냉장고가 넘어지고 천장의 전등들이 전부 떨어져 깨지고 화장실 배관에서는 물이 터져나왔다. 어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데다 새벽에 잠도 안 깬 두 아이를 하나는 얇은 이불로 동여매 업고 하나는 안고 급히 피난을 가면서 생과부 생활을 청산하고 남편이 있는 영국으로 직장을 옮겨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다음날부터 영국의 경제잡지인 이코노미스트의 대학교수 모집 광고만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봤다. 드디어 레스터대 경제학과에 자리를 얻어 옮겼는데 인생이란 역시 계획한 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남편 때문에 영국으로 왔는데 남편은 필생의 꿈인 모교 교수로 내정됐다. ‘아내가 막 영국으로 직장을 옮겼으니 아내가 한국에서 자리를 얻을 때까지 1∼2년만 더 영국에 있다가 모교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냈다가는 평생 모교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될지 몰랐다. 오라고 할 때 당장 가야 했다.

생과부 신세를 면하려고 영국까지 갔는데 미국보다 훨씬 더 힘든 생과부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캘리포니아는 날씨가 좋아 아이들이 건강했는데, 영국은 1년 내내 흐리고 비가 오고 추워서 아이들이 감기와 각종 알러지를 달고 살았다. 하나가 겨우 낳으면 다른 하나가 앓는 식이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영국에서는 살짝 감기라도 걸리면 다른 아이에게 옮는다고 유아원에 못 나오게 했다. 아이 때문에 결근이 잦다 보니 학과 사무실에서는 거의 매일 불평소리였다. 성경에서 왜 과부를 돌보라고 했는지 생과부 3년을 겪은 후로는 너무나 절절히 가슴에 맺히도록 깨달았다.

왜 나를 영국에 보내셨을까. 영국으로 온 결정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을까.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필요보다는 나의 필요, 당장 힘든 생과부 생활에서 벗어나려는 나의 이기적인 필요에만 압도돼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놓친 것은 아닐까.

당시는 매일 눈물로 하나님께 아뢰었지만 지금은 그 오묘한 인도하심에 또다시 무릎을 꿇는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