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카페] 한은 승진시험서 ‘문·사·철’ 강조 왜

입력 2013-09-10 20:59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의 차이를 서술하라.’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반서구주의)의 차이를 논하고 세계 교역의 확대가 세계평화에 미치는 영향을 쓰라.’

지난 6일 치러진 한국은행 승진시험(300점 만점)에서 가장 많은 비중(60점)을 차지하는 2개의 논술 주제다. 37명의 과장 진급 후보자들은 이날 논술 주제가 적힌 시험지를 받고 쩔쩔맸다고 한다.

딱 봐선 환율·금리·물가를 관리하는 중앙은행 업무와 동떨어져 보였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꼭 이런 식으로 문제를 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불평도 했지만, 광범위한 주제에 독창성을 중시하는 프랑스 대입시험 ‘바칼로레아’를 연상시킨다는 평가도 나왔다.

지난해 논술시험에서도 ‘삼강오륜(三綱五倫)의 현대사적 의미를 논하라’, ‘대중문화와 현대예술의 바람직한 관계를 기술하라’라는 주제가 출시돼 응시자들을 당혹하게 했다. 그래서인지 지난해 낙방한 사람은 전체 응시자의 20%나 됐다. 부문별 100점 만점으로 환산했을 때 60점만 넘으면 되는 절대평가임을 고려하면 과거보다 탈락률이 굉장히 높아진 것이다.

한은의 대졸 공채 직원 중 절반 이상이 경제학 전공자다. 대부분은 명문대를 나왔다. 그러다 보니 늘 사고의 다양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나왔다. 한은이 외부와 스스로 고립돼 자기들 생각에만 집착하는 ‘갈라파고스’로 불리는 이유다.

2010년 취임한 김중수 총재는 이 같은 한은의 경직된 문화를 꼬집으며 ‘문·사·철(문학·역사·철학)’을 바탕으로 한 유연하고도 종합적인 사고 능력을 강조해 왔다.

이에 맞춰 그동안 경제·경영 전공 등으로 한정됐던 신입사원 지원자격도 전(全) 전공으로 넓혔다. 과장 승진 논술 문제 역시 문·사·철을 기반으로 경제와 사회 현상을 논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조강래 한은 연수총괄팀장은 10일 “금융위기 이후 경제학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인간의 행동을 기반으로 경제·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능력을 기르고 미래 경제예측에 인문학적 통찰력을 강조하자는 취지”라고 밝혔다.

한장희 기자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