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 호찌민 前주석 묘 헌화… 아버지의 敵, 딸의 ‘화해 프로세스’
입력 2013-09-09 17:50 수정 2013-09-09 22:15
베트남을 국빈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베트남 건국영웅 호찌민 전 국가주석의 묘소를 찾았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는 ‘적(敵)’의 수장이었던 호 전 주석 시신이 보존된 묘역에 대한민국 국가 정상으로서 최대한의 예절을 갖춰 헌화·묵념했다.
오전 9시15분쯤 하노이 바딘 광장. 호 전 주석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광장의 오른편 입구에 의전차량을 탄 박 대통령이 수행원 50명과 도착했다. 박 대통령은 차량에서 내려 광장 가운데 호찌민 묘역까지 200여m를 걸었다. 검은 재킷과 검은 스커트 차림의 박 대통령은 베트남 정부가 명예수행원으로 보낸 응웬 티 하이 쮜엔 노동보훈사회부 장관과 함께 계단을 올랐다.
박 대통령 앞에는 베트남 전통에 따라 노란색 국화과 식물인 ‘호아 따이방’ 꽃 수백 개로 장식된 조화가 의장대 손에 들려 있었다. 박 대통령의 얼굴에는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듯했다. 아버지와 베트남 전쟁, 호 전 주석으로부터 시작된 현대 베트남과 양국의 역사가 모두 녹아 있는 얼굴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베트남전 파병을 통해 조국 근대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1964년 파병 결정으로 우리나라는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제공받아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한국 근대화의 이면에 베트남인들의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조화로 다가가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라고 쓰인 한글과 베트남어로 적힌 리본의 끝을 호아 따이방에 붙이며 조의를 표했다. 베트남 전통 헌화 예절에 따랐다. 이어 호 전 주석 시신이 안치된 묘역 안으로 들어가 짧게 묵념한 것으로 알려졌다.
역대 대통령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호 전 주석 묘역을 참배했다. 1998년 김 전 대통령은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파병을 사과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묘소에 참배했고, “우리 국민이 마음의 빚이 있다. 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고 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묘소를 찾긴 했지만 과거에 대한 사과는 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묘역 밖에서도, 안에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추모의 마음과 베트남 예법에 맞춰진 헌화와 묵념만으로도 베트남의 과거와 현재·미래를 존중하고, 대한민국의 동반자라는 사실을 충분히 표현했다고 판단한 듯하다. 박 대통령은 오후 호 전 주석의 거소도 둘러봤다.
청와대 측은 “박 대통령은 방문외교를 펼칠 때마다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 역사를 최대한 존중하고 있음을 행동을 통해 보여왔다”고 밝혔다.
하노이=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