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박길성] 정기국회에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입력 2013-09-09 18:35
“힘으로 얼룩진 정치가 아닌 문화로 다듬어진 정치를 만들었으면 한다”
2013년 정기국회가 문을 열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열리는 첫 정기국회이건만 새로운 희망과 기대는 애당초 포기해야 할 것 같다. 한없이 착잡하고 국민께 부끄럽고 송구하며 아직 정기국회 100일의 시간표조차 만들지 못했다는 국회의장의 개회사는 안쓰럽다 못해 처참하다. 지난 10년 노무현정부, 이명박정부 동안 정기국회 회기를 넘기기는 일쑤였고, 파행국회라는 오명을 쓰지 않은 정기국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 국회도 예외는 아닌 듯 시작부터 조짐이 안 좋다.
날림, 파행, 몸싸움, 막말, 당리당략…. 우리 국회에 붙어다니는 고정 수식어다. 국민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 국회의 모습은 여의도(汝矣島)의 어의적 의미 그대로 ‘너나 가져라’라는 천덕꾸러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권력만 있고 권위는 없고, 정략만 있고 정책은 없으며, 과거만 있고 미래는 없는 집단으로 각인되어 있다. 개회를 했건만 시간표도 만들지 못한 국회를 향해 토론과 절차와 품격을 갖추어 달라는 주문은 너무 과분하다. 그저 올해에는 정기국회를 회기 내에 마무리나 해 달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주문일 듯하다.
우리가 가꾸어야 할 정치를 생각해본다. 정치란 타협과 절충의 기술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정치는 도구적 수단이다. 정치란 과도한 이념이나 이상의 무게에 눌려서는 안 된다. 한국정치의 고질적 현상인 일도양단의 이분법적 밀어붙이기 식의 관행을 넘어서는 길은 타협하고 절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타협이나 절충을 하지 않고 민주적으로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없기 때문이다.
타협이나 절충은 야합이나 협잡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관리하고 조정하는 미덕이자 규범인 것이다. 민주주의에는 서로 다른 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반대편을 만들어내는 것이 민주주의다. 정치란 다른 의견, 다른 세력과 대화하고 설득하고 타협하고 절충해서 의미 있는 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동의하고 합의할 수 있는 조건을 먼저 찾아보는 것이다. 서로 다른 입장이지만 상대방의 몫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구의 선진 복지국가나 정당정치는 이념, 세대, 계층, 지역의 다른 지점들이 만들어놓은 타협과 절충의 제도적 산물이다. 타협과 절충은 물질적 이해를 둘러싼 갈등은 물론이고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을 풀어내는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국민의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나오고 있다. 아픈 곳이 너무 많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종류도 다양하고 내용도 심각하다. 태평양 건너 LA 다저스 류현진 선수의 승전보를 최대 위안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국회의 모습이 ‘너나 가져라’라는 천대받는 황무지로 돌아가지 않으려거든 이번 정기국회는 정말 달라져야 한다.
정기국회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국민에게 담대한 희망을 심어 달라고 하지도 않겠다. 복지와 경제의 절묘한 균형 최적점을 제시해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겠다. 가치논쟁과 사실논쟁과 정책논쟁을 혼돈하지 말아 달라는 수준 높은 주문은 더더욱 하지 않겠다. 상식에 벗어나지만 말아주기를 부탁할 뿐이다. 날림국회, 파행국회, 몸싸움국회, 막말국회, 당리당략국회라는 표현이 이번 정기국회에서는 덜 나오기를 바란다.
내년 한 해의 나라 씀씀이며 국민 행복과 안위의 청사진을 결정하는 것이 정기국회 아닌가. 그래서 정기국회에 쏠린 국민의 관심은 결코 가볍지 않다. 토론하는 국회, 민의를 품는 국회, 품격 있는 국회, 서로 칭찬하는 국회의 모습을 국민은 보고 싶어 한다. 찌질한 정치가 아닌 통 큰 정치, 밀쳐내는 정치가 아닌 품는 정치, 힘으로 얼룩진 정치가 아닌 문화로 다듬어진 정치를 만들어야 한다.
행복이 사회의 화두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고 해석이다. 몇몇 경제수치 조금 좋아진다고 행복이 커지는 것 절대 아니다. 국회가 상식에만 벗어나지 않으면 국민의 행복 엔돌핀은 크게 올라갈 것이다.
박길성 (고려대 교수·사회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