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염성덕] 나라 구한 派獨 근로자들

입력 2013-09-09 18:35

춘궁기의 암운이 짙게 드리운 시절이었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난 가정은 드물었다. 하루 세 끼를 해결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반석죽(朝飯夕粥)이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소원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6·25전쟁의 폐허에서 주저앉지 않고 희망을 품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북한의 경제 사정이 남한보다 좋았던 때였다.

그때 정부가 독일 탄광으로 떠날 젊은이들을 모집했다. 100명 모집에 2500명이 지원한 적도 있다. 1963년 바늘구멍을 통과한 123명이 독일로 떠났다. 60년대 한국 실업률은 30%대에 달했다. 경제건설의 마중물 역할을 할 외화는 턱없이 부족했다.

광부들은 제 한몸 돌보지 않고 가족과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찜통 같고 칠흑 같은 땅속 800m 아래의 막장에서 비지땀을 흘렸다. 탄가루와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구별할 수 없어서 신원 확인을 위해 부여된 번호가 이름을 대신했다.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드는 막장에서 이들이 캔 것은 석탄이 아니라 조국의 산업화에 필요한 ‘검은 금’이었다. 77년까지 독일로 향한 광부는 7983명이었다. 지식인들도 뛰어들었다.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1진은 71년 독일 땅을 밟았다. 이들은 76년까지 1만1057명으로 늘어났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갓난아기를 고향에 두고 이역만리 길에 오른 이들도 있다. 한복을 입고 낯선 독일 공항에 내리는 간호사들의 영상을 보면 지금도 코끝이 찡하다. 이들은 연장근무나 주말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간호사 월급은 한국보다 독일이 몇 곱절 많았다.

파독(派獨) 근로자들의 헌신과 노고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디딤돌이 된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한민족의 근면, 성실, 잠재력도 세계에 알렸다.

지난 4일부터 7일까지 서울 광화문 중앙광장에서 ‘파독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 헌정기념전’이 열렸다. 파독 근로자들의 삶과 애환을 보여주는 사진관, 유물관, 인터뷰영상관 등으로 꾸며졌다. 주제는 ‘기적을 캐내고 나라를 구하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업적을 되돌아보면 딱 맞는 주제다.

독일은 내달 현지에서 헌정기념전을 개최한다. 11월부터는 부산 대구 대전 등 전국 14개 지역에서 순회전이 열린다. 주최 측은 해당 지역의 교육청·시민사회단체들과 연계해 초·중·고생들의 관람을 적극 권장할 필요가 있다. 생존한 파독 근로자가 자원봉사자로 나서 당시 상황과 감회를 설명한다면 뜻깊은 행사가 될 것이다. 이것이 산 역사의 현장이다.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