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신창호] G20정상회의와 아베 총리 행보
입력 2013-09-08 19:05 수정 2013-09-09 00:44
2000년대 들어 유엔 같은 국제기구에서 활동하는 일본 출신 외교관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국제통화기금(IMF) 부총재를 지낸 가토 다카토시씨를 제외하면 국제적으로 명망 있는 일본인 외교 전문가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선진국 시민으로 대접받는 일본인들이 왜 국제 외교무대에서는 찬밥 신세일까. 외교 전문가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바로 일본인들의 편협한 역사관 때문이라는 것이다. 국제 전문가라면 자신의 조국을 뛰어넘을 수 있는 보편적인 세계관이 필수적이다. 그게 있어야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국제 분쟁에서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인들에게는 자국 중심주의 의식이 팽배해 있고, 엘리트층으로 갈수록 이런 경향이 더 심하다. 바로 이 자국중심주의 의식이 일왕(日王)에 대한 신격화로 이어지고, 엄청난 과거 전쟁범죄를 뻔뻔스럽게 부인하는 왜곡된 역사인식으로 변형된다고 한다. ‘지구촌 시대’에 국제 표준을 멀찍이 벗어난 의식체계를 가진 일본인들이 국제기구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겠느냐는 의심이 각국 외교관들 사이에 굳어졌고, 이는 곧바로 외교무대에서 일본 출신 외교관 급감 현상으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지난 7일 끝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는 세 명의 한국인이 정상 라운드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우리 국적을 가진 박근혜 대통령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그리고 미국 국적자인 김용 세계은행 총재가 바로 그들이다. 박 대통령의 제1 관심사는 당연히 대한민국의 이익이었겠지만, 반 총장이 회의기간 내내 고민했던 문제는 전혀 달랐다. 아마 한창 진행 중인 시리아 사태를 각국 정상들과 어떻게 풀어갈지 하는 문제에 온통 집중했을 법하다. 김 총재 역시 한국이나 미국을 제쳐놓고 세계은행의 역할에 고심했을 것이다.
정상 라운드테이블에서 박 대통령 반대편에 자리를 잡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일본의 이익을 얻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양자 회담을 갖고선 평화헌법의 수정 내지 해석변경을 인정받으려 했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서는 사할린을 둘러싼 영토분쟁 문제를 해결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런 그의 노력은 회의 마지막 날 단 30분 동안 진행됐던 한·독 정상회담에서 직격탄을 맞았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일본의 과거사 반성을 촉구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이다. 똑같이 과거 전쟁범죄 역사를 지니고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치 범죄를 사죄한 앙겔라 총리와 정반대로 틈만 나면 “우리는 아무 죄가 없다”고 발언해 온 아베 총리의 행보가 극명한 대비를 이룬 순간이었다.
청와대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첫날 정상 업무만찬 직전 리셉션장에서 26개국 정상 모두와 5분 이상 대화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두 번이나 박 대통령을 찾았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는 20분 이상 환담했다.
반면 바쁘게 리셉션장을 누빈 아베 총리는 어딘가 모르게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고 한다. 다른 정상을 찾아가 말을 걸었지만, 정작 자신을 찾아온 다른 국가 지도자는 거의 없었다는 전언도 있다. 일본과 가장 첨예한 이해관계를 지닌 한·중 정상으로부터는 제대로 인사조차 받지 못했다. 러시아의 아름다운 고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기간 러시아 TV에 잡힌 아베 총리의 모습을 보면서 내내 일본인 외교관들의 ‘운명’이 떠올랐다.
상트페테르부르크=신창호 정치부 차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