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홍하상] 스위스가 부자된 비결
입력 2013-09-08 19:04
지금부터 150년 전까지 스위스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전 국토가 알프스 산맥에 빙 둘러싸여 있는 고립된 분지에, 알프스 위에는 만년설이 늘 쌓여 있어 한여름에도 냉해가 심해 농작물이 잘 자라지 못했다. 그들은 치즈를 만들어 겨우내 저장한 썩은 감자 수프와 함께 먹으면서 6개월이나 되는 긴 겨울의 허기를 달래야 했다. 그래도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지 않자 그들은 용병 수출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스위스인들은 다른 국가들이 전쟁을 할 때마다 자신들의 용병을 파견해서 그 월급을 본국의 가족들에게 송금했다.
1527년 5월 6일 이탈리아군이 바티칸 교황청을 공격했다. 이때 막강한 이탈리아를 맞이해서 싸운 것이 바로 교황청을 지키던 스위스 용병이었다. 그러나 중과부적. 결국 스위스 용병 147명이 현장에서 전사했다. 1798년 프랑스의 마지막 황제였던 부르봉 왕가의 루이 16세를 지키던 것도 600명의 스위스 용병이었다. 그들도 왕정을 타도하려는 수십만명의 시민혁명군과 용맹하게 싸우다가 전원 죽음을 택했다.
오늘날에도 로마 교황청을 경호하고 있는 병사는 스위스 용병이다. 600년 된 전통이다. 스위스의 루체른에 가보면 ‘빈사의 사자상’이라는 석상이 있다. 바위의 벽면에 죽어가는 사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데 사자의 배에 부러진 창이 꽂혀 있다. 이것이 바로 고향의 처자를 그리며, 숨을 헐떡거리면서 죽어가던 스위스 용병을 상징하는 것이다.
용병수출에서 시계·의약으로
이러한 스위스의 용병 수출은 180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즉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스위스인은 용병 수출로 먹고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은 아버지와 형제들의 목숨을 팔아 먹고사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절치부심 끝에 새로운 산업을 찾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시계와 의약이다.
16세기 후반 종교 박해를 피해 프랑스의 위그노 교도들이 스위스로 넘어왔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샤프하우젠과 쥐라 지방. 그들은 그곳에서 시계를 만들었다. 스위스인들은 위그노들이 가지고 있는 시계 제작 기술을 배워 수출하기 시작했다.
배낭에 가득 시계를 넣고, 해발 5000m가 넘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에 내다 팔았다. 작고 가벼우며 고부가가치를 지니고 있는 시계는 한 배낭만 내다 팔아도 큰 돈이 되었다. 드디어 먹고살 수 있는 새로운 산업이 생긴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 더해서 알약도 만들기 시작했다. 제약산업 또한 약초가 많은 스위스의 자연환경과 맞아떨어졌다. 그들은 거기에 또 한번 목숨을 걸어 그것 또한 발전시켰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최고의 스위스 시계와 제약산업의 출발이다.
우리도 이노베이션 배워야
시계나 알약을 배낭에 가득 넣은 스위스 상인들이 알프스를 넘어 유럽 국가에 다녀오면 그들의 배낭 속에는 금과 은이 넘쳐났다. 요즘도 바쉐론 콘스탄틴 같은 시계는 개당 1억∼2억원을 호가하듯이 한 배낭 가득 시계를 메고 알프스를 넘어 갔다 오면 장사꾼 한 사람이 적어도 100억∼200억원의 매상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시계산업은 해마다 17조원어치를 수출하고, 제약의 노바티스가 420억 달러, 로슈가 349억 달러의 매출을 해마다 올린다.
2년 전에는 기름 한 방울 없이 날아가는 태양열 비행기를 만들었고, 우주공간에 용도 폐기된 떠돌이 인공위성을 청소하는 위성청소용 위성을 만들어 돈을 벌기 시작했다.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스위스의 1인당 소득은 8만3000달러, 국가경쟁력지수는 세계 1위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이노베이션을 배워야 한다.
홍하상 (논픽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