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이종원] 히스패닉 투표와 이민정책

입력 2013-09-08 18:20


요즘 미국 공화당 의원들은 스페인어를 배우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히스패닉계 의원이나 스페인어를 조금이라도 아는 의원들은 ‘유니비전’이나 ‘텔레문도’ ‘CNN에스파뇰’ 같은 스페인어 방송에 출연하거나 적극적으로 히스패닉계 유권자들과의 접촉을 확대하고 있다고 한다.

다들 미국 정치에 있어서 점차 강화되고 있는 히스패닉 투표의 위력을 의식한 행동이다. 흑인, 즉 아프로 어메리칸의 눈물과 땀이 결실을 맺어 최초의 흑인 대통령까지 배출하고 있으나 앞으로의 미국 정치는 흑인층보다 히스패닉 유권자들이 더 중요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변모되고 있다. 물론 여성과 아시안의 영향력도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히스패닉 유권자들의 선거에서의 영향력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선거를 통해서 크게 주목받았다. 히스패닉은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으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해 왔지만, 지난해 대선에서는 히스패닉 유권자의 71%가 오바마 대통령에게 투표하고, 밋 롬니 후보에게는 단지 27%만이 투표해 공화당 내에서 자성과 탄식이 나오게 만들었다.

이러한 히스패닉의 영향력은 그들이 속한 커뮤니티의 동질성과 급속한 인구증가에 기인하고 있다. 높은 출산율, 합법적 이민 증가, 불법체류자 확대 등에 의해 그들 인구는 현재 약 530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고, 그중 유권자 수는 2370만명에 달하고 있다. 2050년이 되면 히스패닉계 인구가 미국 전체 인구의 25%까지 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그러다 보니 선거에 직접 참여하는 유권자로서 히스패닉의 존재를 결코 무시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구애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대선공약이기도 했지만 1100만명에 달하는 불법체류자와 청소년들의 미래를 고려하면서, 미국 기업의 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히스패닉과 아시안 커뮤니티의 오랜 요구였던 이민법 개정이 도마에 오르게 된 것이다. 최근 오바마 대통령이 제출한 이민개혁법안이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를 극복하고 하원에서 통과될 수 있을지가 주목받고 있다. 이미 상원에서는 공화당의 존 매케인(애리조나), 마르코 루비오(플로리다), 민주당의 찰스 슈머(뉴욕) 상원의원들이 강력히 주장하여 68대 32로 통과되었지만, 공화당이 장악한 하원에서는 아직 팽팽한 대립이 진행 중이다. 최근 일부 유명한 정치인들이 공화당의 반이민 정책을 변경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공화·민주 양당의 전직 장관들과 주지사들이 주축이 된 ‘초당적 정책센터’가 이민개혁법안을 진전시킬 방안을 제시한 바 있으나, 공화당의 묵은 반이민 정책과 최근 경기쇠퇴에 따른 미국 정치 전반의 반이민 여론을 의식하고 있는 의회가, 그것도 공화당이 다수인 하원이 어떻게 대응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공화당 전략가들이 히스패닉 투표층을 끌어안기 위해 히스패닉과의 접촉을 늘리고 이민법 개정을 적극 추진하는 데는 레이건 대통령과 양 부시 대통령 선거 때의 투표 성향을 볼 때 히스패닉 유권자들이 절대적으로 민주당에만 기울어져 있지 않고 ‘스윙(swing) 투표자’였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둔 나름의 기대 섞인 전망을 담고 있다. 또한 히스패닉의 대다수가 상대적으로 보수적 종교인 가톨릭 신자이며, 이는 공화당의 보수적 가족정책에 더 부합한다는 생각도 깔려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향후 미국 정치는 이제 히스패닉 정치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미국 히스패닉 정치의 부상은 계속적으로 다문화국가로 전환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중요한 문제를 던져준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고민하는 한국도 이제 이민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재외국민 223만명, 결혼이주민 15만명이 새로운 투표층으로 진입하고 있고, 외국인 144만명이 경제활동을 하는 글로벌 한국에서 이제 ‘피부색’과 ‘언어’도 고려하는 정치제도 설계와 선거전략이 필요할 때다.

이종원(가톨릭대 교수·행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