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광형] 하야오 감독의 진심은?
입력 2013-09-06 17:33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72) 감독을 직접 본 것은 지난 7월 26일이었다. 5년 만에 내놓은 신작 ‘바람이 분다’ 홍보를 위해 도쿄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로 한국 기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는 영화에 대한 질문보다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인식과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더 많이 받았다.
1주일 전 이에 대한 글을 쓴 바 있는 그는 차분하면서도 담담하게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위안부 문제는 예전에 청산했어야 합니다. 지금 이 문제가 오르내리는 것은 굴욕적이에요.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 일본 정부가 일본인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는 개헌 등 우경화 움직임으로 논란을 빚은 아베 정권에도 돌직구를 날렸다. “우리 총리에 대해 말하긴 그렇지만, 지금 총리는 곧 교체될 것이기 때문에 과거사 문제와 관련한 그의 말이 별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그동안 경제 얘기만 해왔습니다. 내 생각에는 동아시아 지역은 전부 사이가 좋아야 하고, 중국 한국 일본은 서로 싸우면 안 돼요.”
일본에서 7월 20일 개봉돼 흥행 중인 ‘바람이 분다’를 관람하면서 중간에 눈물이 났다. 5일 한국에서도 개봉된 이 영화는 일본의 태평양전쟁 당시 전투비행기 ‘제로센’ 설계자인 호리코시 지로의 이야기를 그렸다. “아름다운 비행기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진 주인공이 죽음을 앞둔 연인과 나누는 애틋한 사랑이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하지만 영화가 종반에 다다르자 그런 감정은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과정이야 어떠했든 결과적으로 전쟁에 부역한 주인공을 미화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의 전쟁 동원에 대한 고뇌나 죄책감은 별로 담겨 있지 않았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에 동원되고 관동대지진 같은 재앙을 겪은 아버지 세대를 위로하려는 것일까.
이에 대한 감독의 설명. “호리코시는 군의 요구를 더 많이 받았지만, 나름대로 대항하며 살아온 인물이에요. 그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무조건 죄를 같이 업고 가야 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아버지도 전쟁에 가담했지만 좋은 아버지였다고 생각해요. 그 시대에 살았다고 해서 비난받기보다는 그 시대가 어디로 가는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기서 거장 감독의 노회한 측면을 읽을 수 있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고, 전쟁을 일으킨 일본인에 대해서는 정당화하는 두 가지 시선. 진심이야 알 수 없겠지만 ‘이웃집 토토로’(1988), ‘원령공주’(1997),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2) 등 숱한 명작을 내놓은 거장이 영화가 아니라 정치적인 발언으로 주목받는 것 자체가 씁쓸하게 느껴졌다.
6일 도쿄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가진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단 그것은 애니메이션은 아니다”고 밝혔다. “지브리미술관을 찾는 팬들에게 어떻게 보답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미술관에서 팬들과 만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미술관 전시품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해 폭소가 터져나왔다고 한다.
상반된 평가를 받는 ‘바람이 분다’는 7일까지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제70회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현지 반응이 좋아 수상 가능성이 높다는 소식이다. 수상이 결정될 경우 그가 수상 소감으로 또 어떤 발언을 할지 궁금해진다.
이광형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