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병권] 박꽃
입력 2013-09-06 18:18
한여름 밤 초가지붕 위에 달빛을 받고 피어있는 하얀 박꽃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꽃잎이 유난히 작기도 하거니와 다른 꽃이 모두 진 한밤에 홀로 피어 사람들의 눈길도 잘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온갖 꽃이 만발하는 여름철에 하필 가난한 집 초가지붕 위에 모습을 드러낸 박꽃은 우리의 가난을 상징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추석을 목전에 둔 이맘때쯤 잘 익은 박을 따 속을 파낸 뒤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박이 잘 여물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바늘로 표면을 찔러봐야 한다. 안 들어가면 잘 여문 것이다. 덜 여문 박을 반으로 갈라 숟가락으로 박속을 긁어낸 것에 소금을 살짝 뿌린 뒤 양념을 해 무채처럼 먹으면 별미 중의 별미다. 서리가 내리고 박이 완전히 자라면 톱으로 반을 잘라 바가지를 만들 수도 있다. 이때는 이미 박속은 맛이 없어 모두 버리거나 소나 돼지의 사료로 쓴다. 바가지를 만들려면 반드시 박 껍질을 삶아 그늘에서 말려야 한다.
박꽃은 우리 민족의 상징인 백색인데다 가난하지만 착한 심성을 가진 흥부가 박 속에서 금은보화를 얻었다는 판소리가 전해질 정도로 친근하다. 그런 탓인지 박꽃을 소재로 한 절창도 넘쳐난다. 대표적인 것이 목월의 시다.
흰 옷자락 아슴아슴 /사라지는 저녁답/ 썩은 초가지붕에/ 하얗게 일어서/
가난한 살림살이/ 자근자근 속삭이며/ 박꽃 아가씨야/ 박꽃 아가씨야/ 짧은 저녁답을/ 말없이 울자.
현대시가 어렵다고 외면하면서 시 읽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청록집’에 나오는 이 시 하나만 읽어보면 우리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다. 해방 직후 너나없이 가난한 시절에 발표된 목월의 ‘박꽃’은 읽으면 읽을수록 절로 눈물이 나오는 감동의 소품임을 부인할 수 없다.
요즘에는 시골에 가도 새마을 운동으로 초가집을 모두 거둬버린 탓인지 박꽃을 보기가 힘들다. 설사 본다하더라도 낮에는 시든 꽃밖에 볼 수 없어 이 꽃이 주는 의미를 제대로 찾기 어렵다. 간혹 도시 공원에 관상용 표주박을 심어 오가는 이들로 하여금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하지만 어디 시골 초가의 박에 견줄까. 이번 추석 고향나들이 할 때는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일부러라도 박꽃을 한번 찾아봐야겠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