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전광판] 무뚝뚝하던 너 , 화려하고 친절해졌구나
입력 2013-09-07 04:00
이것은 야구장 외야 중앙에 우뚝 솟아 있다. 관중에게 정보를 전하고 관중을 하나로 만든다. 바로 전광판이다. 프로야구 초창기의 전광판은 조악했다. 야구팬들은 스코어와 라인업 정도만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전광판은 다르다. 경기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려 줄 뿐만 아니라 화려한 영상과 다양한 이벤트도 제공한다. 또 응원을 유도해 팬들을 단순한 관람자가 아니라 경기의 일부로 만든다. 진화하고 있는 야구장의 전광판을 들여다봤다.
◇똑똑하고 친절한 전광판=이닝이 뭔지, 도루가 뭔지 야구에 대해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는 직장인 이난희(27)씨. 새로 사귄 남자친구는 야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마니아다. 이씨는 올여름 남자친구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야구장(인천 문학구장)이란 곳에 가 봤다. 치어리더들의 파워풀한 댄스와 관중의 함성 그리고 박진감 넘치는 경기까지…. 이씨는 금세 야구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SK 박정권이 타석에 들어서자 관중은 일제히 응원가를 열창했다.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박정권….” 응원가 가사를 몰랐던 이씨는 입을 다물고 머쓱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남자친구가 3루 쪽 스카이박스 아랫면에 있는 ‘띠 전광판’을 가리키며 이씨에게 말했다. “저기에 나오는 가사를 보고 따라 부르면 돼요.” 이씨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오, 저런 게 있었네!”
SK는 ‘스포테인먼트(스포츠+엔터테인먼트)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2007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띠 전광판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그날 이씨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경기가 아니라 전광판이었다. 남자친구는 이씨에게 전광판 보는 법을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전광판과 친해진 이씨는 경기 흐름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닝이 끝날 때마다 펼쳐지는 퀴즈, 댄스미션, 키스타임 등 다양한 이벤트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전광판은 한글과 숫자를 표기하는 데 그쳤다. 경기기록 전달에 그쳤던 전광판은 2000년대 들어 한 단계 발전했다. 컬러가 입혀지고 영상 기능도 추가된다. 최근의 전광판은 대형 멀티비전 기능도 갖췄다. 두산은 멀티비전을 활용해 전지훈련 모습을 경기 시작 전과 경기 중간에 내보내 팬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최신 전광판을 자랑하는 곳은 서울 잠실구장과 대전구장이다. 두산과 LG가 공동 위탁운영하고 있는 잠실야구장 운영본부는 지난 2009년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잠실야구장 전광판을 교체했다. 가로 30m, 세로 10m의 잠실야구장 전광판은 멀티비전으로 전환되는 데다 HD 화질을 구현해 영화관 못지않다.
한화는 지난해 대전시와 함께 대전구장을 리모델링을 하면서 최신 LED 전광판을 설치했다. 이 LED 전광판은 메이저리그 28개 구장에 설치돼 있는 닥트로닉스 제품(세계적인 조명기업)이다. 가격은 약 8억500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완공 예정인 신 광주구장도 메이저리그급 전광판을 설치할 예정이다.
◇전광판을 즐겨라=전광판의 또 다른 기능은 광고다. 프로야구 구단들은 매 이닝이 끝날 때와 투수 교체 때 광고를 내보낸다. 과거엔 기업명과 제품명만 나갔지만 현재는 멀티비전 기능 덕분에 TV 광고를 그대로 옮겨 실을 수 있다. 구단과 구장을 소유하고 있는 지자체는 부가적인 광고 수익을 창출할 수 있고, 광고주는 광고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광고 대가로 각 구단은 야구장을 찾는 팬들을 위해 전광판 이벤트를 통해 식사권, 문화상품권, 항공권, 영화 관람권, 할인 쿠폰 등 다양한 경품을 제공한다.
전광판은 팬들을 위한 이벤트 도구로도 활용된다. 전국의 야구장에서 전광판을 통해 펼쳐지는 공통 이벤트는 ‘키스타임’이다. 키스타임은 야구장을 찾은 커플들을 포착해 키스 장면을 연출하는 이벤트다.
SK의 마케팅 관계자는 “요즘은 다들 카메라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키스타임이나 댄스타임 같은 참여형 이벤트를 적극적으로 즐긴다”며 “올여름 커플들을 대상으로 댄스타임을 진행했는데 갑자기 어떤 커플이 수위가 높은 동작을 해서 급하게 중계 화면을 돌린 적이 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SK의 경우 매년 6∼7월부터 다음 시즌 전광판 이벤트를 준비한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담당자가 큰 방향을 설정한 후 이벤트 대행사와 함께 세부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새로운 이벤트나 새로운 느낌의 영상을 만들어 내는 건 참 어려운 작업이다. 사실 만들고 난 뒤 반응이 좋지 않아 조기에 종료한 이벤트도 꽤 많다”고 덧붙였다.
전광판은 사랑을 고백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각 구단은 ‘사랑의 프러포즈 이벤트’를 시행하고 있다. 이 이벤트는 클리닝 타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프러포즈하는 장면을 전광판으로 방영하는 것이다. 이 이벤트는 2000년 두산이 처음 시작됐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두산은 올해 온라인 호텔예약전문 기업인 호텔조인과 손잡고 프러포즈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두산 홍보팀의 이왕돈 차장은 “한 달에 2∼3 커플이 프러프즈 이벤트에 참여하는데, 신청자들이 몰려 당첨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며 “호텔조인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을 받는데 사연이 남다른 커플들을 골라 이벤트를 주선한다. 예전에 어떤 분이 여자친구에게 차인 뒤 재결합하기 위해 프러포즈 이벤트를 신청해 당첨됐는데 전 여자친구가 꽃다발을 팽개치고 야구장에서 달아나 버리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말했다.
전광판은 어디까지 진화할까? 현재 전광판은 스마트폰과 연동되는 단계까지 진화했다. 이미 해외에서는 팬들이 전광판을 통해 게임을 즐기거나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전광판이 똑똑해질수록 경기는 더욱 재미있어진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