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문화가 있는 이웃 이야기] 사랑이란 밑그림에 ‘열한가지 행복’ 그렸어요
입력 2013-09-06 17:27
3代 미술전시회 ‘가가호호’ 연 유명애 권사 가족
한국전쟁 중 평양에서 남쪽으로 피란 온 유두환(독립유공자) 목사 가족 23명이 둥지를 튼 곳은 인천의 사돈댁이었다. 다름 아닌 유 목사의 둘째 며느리 박정희(90·인천 화도감리교회) 장로의 친정집이었다. 맹인점자 창안자인 송암 박두성 선생과 김경래 권사 부부는 크리스천의 넓은 마음으로 이북에서 피란 온 사돈가족을 받아들였고 10년을 함께 즐겁게 살았다.
당시 그 집에는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난리통에 장남감도 마땅치 않던 때. 전직 교사 출신의 박 장로는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박 장로는 구호품 상자에 있던 8색 크레파스, 펜글씨가 촘촘히 쓰여 있는 대학노트를 챙겨 아이들을 데리고 들로 산으로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
이렇게 시작된 그림 그리기는 3대를 이어오면서 가족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게다가 가족전시 ‘가가호호- 할머니부터 손녀까지 함께 즐기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열 정도로 실력도 수준급이다. 이번 가족전은 다원가족연구소 대표 권영인(40·동숭교회) 집사가 주관했다. 권 대표는 박 장로의 외손녀이며 강원도 춘천 예예동산을 운영하는 수채화가 유명애(68·춘천 한울섬김교회) 권사의 딸이다. 지난달 31일 가족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삼성동 이루미술관에서 이들 가족을 만났다.
예술을 하는 ‘닮은꼴 가족’
외모뿐 아니라 취미, 좋아하는 것 등 가족은 참 많은 부분이 닮았다. 그런 의미에서 권 대표 가족은 그림을 좋아한다. 전시에는 권 대표를 기준으로 할머니 박 장로와 엄마 유 권사, 작은엄마 한길례(61·다사랑교회) 집사, 이모 유인애(63·춘천 한울섬김교회) 권사와 이모부 변우현(67·강원대 명예교수) 안수집사, 5촌이모 유경애(47·인천 화도감리교회) 권사, 큰고모 권명자(71·길음교회) 권사, 사촌언니 신혜정(47·군포 한울교회) 집사, 시아주버니 서용만(48·춘천 한울섬김교회) 목사와 형님 정은지(44) 사모 등 11명이 참여했다. 모두 할머니와 엄마가 그림을 가르쳤거나 둘의 영향을 받은 전문 예술가, 혹은 아마추어들의 작품이다. 전시작품은 수채화, 공예, 사진, 서예 등 다양하다.
권 대표는 “가족이 무언가를 한다고 하면 일단 거창하게 생각하는데 가족이 즐거워하는 것을 한가지쯤 서로 공유한다면 가족 모임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말했다. 권 대표 가족은 예술이라는 문화를 통해 서로 소통하는 즐거움을 맛보고 있다. “나의 행복을 위해 시작한 일이라도 그 경험을 가족과 함께 공유하면 즐거움과 기쁨은 배가 됩니다. 또 가족은 이런 활동을 통해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권 대표 가족은 사돈마저도 살갑다. 가족전의 관계도를 잘 보면 작가 대부분은 권 대표 친정식구들이다. 서 목사 부부만 시댁식구다. 그것도 서로 대면을 기피할 정도로 어렵다는 시아주버니와 제수 관계. 그런 시아주버니가 제수의 엄마, 그러니까 사돈어른에게 그림을 배웠다.
이미 60여년 전 한 집에서 사돈이 어울려 한솥밥을 먹은 경험이 있던 유 권사는 “세상적으로 보면 사돈이 아주 어려운 관계지만 우린 신앙이 있으니 통하는 게 많다”고 말했다. “그 옛날 전쟁 중에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함께 어울려 찬송을 부르곤 했습니다. 두 분이 맷돌질을 하면서 부른 ‘주 안에 있는 나에게’란 찬송은 아직도 귀에 쟁쟁하지요.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한 형제요, 자매니 가능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딸의 시아주버니도 편안합니다.”
회복을 선물한 가족 문화
신앙 안에서 모인 가족 공동체. 그 마음 밭을 더 풍성하게 색칠한 건 그림이었다. 유 권사는 매주 목요일 예예동산에서 그림교실을 연다. 춘천을 비롯해 수원 안양 서울 등지에서 온 13명이 그에게 그림을 배운다. 이들 중 서 목사 부부도 있다. “심적으로 힘들 때 예예동산을 찾아 머물곤 했었다”고 그는 말했다.
원래 서 목사는 경영학을 전공하고 대기업 건설회사에서 근무했다. 미국지사에 파견돼 몸을 사리지 않고 일했다. 하지만 IMF 때 회사가 위기를 겪으면서 자신에게도 시련이 닥쳤다. 결핵이 재발해 건강이 악화된 것.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한 게 이유였다. 결국 회사에 사표를 내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잠시 잃었던 신앙을 다시 회복했습니다. 2001년 서른여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됐습니다. 사역지를 놓고 기도하는 과정에서 예예동산을 찾았고 마침 권사님이 출석하는 한울섬김교회에서 요청이 있어 협동으로 사역하게 됐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권사님을 비롯한 다른 사돈어른들도 출석합니다. 사돈이라 어려운 사이가 아니라 비전을 공유하고 나누는 우리는 동역자입니다.” 시아주버니는 특히 사돈어른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영성생활이 한결 여유롭고 평화로워졌다고 고백했다.
꿈을 찾아준 가족 문화
갓 시집온 작은엄마 한 집사는 그림 그리는 형님(유명애 권사)을 부러워했다. 그림보다 서예에 관심이 있던 작은엄마는 서예학원에 등록했다. 그렇게 붓을 잡은 지 10여년. 국전 초대작가가 됐다. 꿈은 나이에 상관없다. 하고자 하는 열정만 있으면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금 작은엄마는 그룹 초대전, 개인전 등을 활발히 열면서 중견 서예작가로 활동 중이다.
이모 유인애 권사는 그림이란 달란트를 통해 꿈을 선물한다. 미술치료사인 이모는 엄마와 함께 올망졸망할 때부터 할머니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강원대 교수인 남편을 따라 춘천으로 온 뒤부터 소외이웃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가르치고 있다. 특히 말기암 환자,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관심이 많다.
“가정을 보살피지 않던 한 아버지가 말기암으로 투병 중입니다. 가족은 모두 떠나고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딸이 아버지를 보살피는데, 감정이 좋지 않아요. 하루는 ‘사랑’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아버지가 그림을 들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딸을 사랑한다’며 엉엉 우는 겁니다. 아버지를 그토록 미워하던 딸도 같이 울고요. 아버지는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내년도 달력을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죽지만 사랑하는 딸에게 뭐 하나는 남겨주고 떠날 수 있어 마지막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치유가 그림에서 시작됐습니다. 잠시 행복이란 꿈도 그림이 전해줬습니다.”
사랑에서 출발하는 가족 문화
개인주의가 팽배한 요즘에는 가족마저도 짐처럼 여기는 세상이 돼버렸다. 가정은 개인이 안식과 생명의 성장을 이룰 수 있는 토양이요, 보호막이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이 바로 사랑이다. 그런데 이 가족들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진 것 같아 안타깝다고들 했다.
권 대표는 “우리 집은 할머니께서 가족을 사랑의 눈으로 보셨기 때문에 그림을 가르쳤고 어느새 가족의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며 “공원 산책, 노래 부르기, 공연이나 영화 감상 등 평소 가족이 좋아하는 것으로 가족의 문화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할머니처럼 그림을 퍼뜨리며 살고 있는 엄마 유 권사는 “삶과 신앙의 길에 맛과 멋을 주는 게 예술”이라며 “가족의 전통적 문화가 예술적 여유를 지닐 때 경직된 긴장감은 풀어지고 사랑, 그리움, 꿈같은 감성들로 채워진다”고 말했다. 가족전은 오는 14일까지 열린다.
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