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8. 신앙생활 : 예배, 성찬, 기도] ④ 기도와 응답

입력 2013-09-05 18:33


모든 기도 반드시 응답받지만 무속신앙 소원성취와는 달라

한국교회는 기도를 강조한다. 목회자들은 신자들에게 기도하라는 말을 자주 한다. 기도하라는 권유를 들을 때 신자들은 궁금하다. 내 기도가 응답받을 수 있을까.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는가. 기도에 대해 많은 의문이 있지만, 기도는 질문하기가 주저되는 주제다. 오늘은 기도 중에서도 가장 예민한 ‘응답’에 대해 대화하려 한다.

기도 응답에 대한 오해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 모든 기도는 응답받는다. 하나님이 살아 있는데 응답이 없을 수가 없다. 성경은 수도 없이 기도하라고 권한다. 예수님은 친히 기도를 가르치셨다. 응답되지 않는다면 성경이 기도하라고 할 리가 없다.

한국교회에서 기도와 연관해 흔히 듣는 말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응답받을 줄로 믿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말이 기도 응답에 대한 오해를 만든다. 즉 기도는 무조건 강하게 해야 한다거나, 기도제목을 정해놓고 사생결단을 하라는 권유로 이어진다. 심지어 기도 응답을 조건으로 작정헌금이나 감사헌금을 미리 하는 진풍경도 벌어진다.

성경에 믿고 구하라는 언급이 있다(마 21:22). 이 본문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믿고 구하라’는 말을 ‘강하게 기도하면 모두 들어주신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다. 이런 해석은 기도를 일방적인 것으로 만든다. 무조건 매달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는 자기 염원의 표출이다. 어떤 기도든지 세게만 하면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기도하는 자의 태도가 아니다. 이런 기도는 대단히 무례하다.

또 세게 간구하면 모두 들어주는 신은 ‘자판기의 신’이다. 단지 어떤 요청이 있으면 기계가 작동하듯이 움직이는 신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신은 수동적이며, 그 기도가 선한지 악한지 판단도 하지 못하는 기계장치일 뿐이다.

관계적, 연속적

모든 종교에 기도가 있다. 무속신앙에서도 기도를 한다. 종교마다 기도의 성격이 다르다. 기독교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기도의 특징이 있다. 이 특징을 두 가지로 보겠다.

첫째, 기도는 관계적이다. 기도는 혼자 하는 독백이 아니다. 기도는 어떤 것을 요구하고, 그 요구가 성취되는 것에 주안점이 있지 않다. 많은 교인이 기도응답을 자신이 원하는 ‘내용’이,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여기에 부합하는 결과를 얻으면 응답을 받은 것이고, 부합하지 않으면 응답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요구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당황하고, 몇 번 응답을 받지 못하면 기도의 응답성에 대해 의심한다.

기도는 일방적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해서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격으로 지으시고, 인간에게 책임적 존재로 살도록 ‘허락’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적 성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기도는 대화이고 인격적 교제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어가고, 그의 뜻을 알게 되고,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기도가 일회적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응답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그에 대한 교제가 더 중요하다.

둘째, 기도는 연속적이다. 기도는 한 번의 요청과 그에 따른 한 번의 응답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도를 ‘소원성취’와 같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기도는 대화이고 교제이기에 ‘연속’된다. 즉 내가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듣는다. 하나님의 뜻을 듣고, 그에 대한 나의 응답이 다시 하나님에게로 간다. 하나님은 나의 응답을 보시고, 다시 새롭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의 제목과 결과로 마무리되는 일회적이라기보다 언제나 연속적 과정을 가진다.

기도와 소원성취의 차이를 보면, 위 두 가지 특징이 극명히 드러난다. 소원성취는 우연이든 요행이든 ‘결과만’ 나오면 성취된 것으로 간주한다. 여기에는 인격적 교제가 없다. 성취된 순간 일회적으로 끝난다. 하지만 기도에는 인격적 교제가 있으며, 일회적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기독교의 기도는 무속신앙의 소원성취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기도를 무속종교의 소원성취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는가

많은 신자가 궁금해하는 것이 있다. 기도로 하나님의 뜻이 바뀔 수 있는가. 바뀔 수 없다면 기도하는 것이 무의미할 것이며 기도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면 보자.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기도의 응답을 일회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먼저 기도의 응답은 연속적이고 지속적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즉 기도에서 하나님과 내가 서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뜻을 맞춰 나간다. 기도라는 ‘대화’가 고정되지 않고 ‘발전’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때로는 나의 기도의 내용과 방향이 바뀐다. 하나님의 응답을 보며,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서, 나의 요청이 바뀌는 것이다. 기도가 이어지면서 새로운 기도가 된다.

또한 하나님의 계획이 변경될 수도 있다. 살아있는 하나님이므로, 우리와 대화하면서 계획을 바꾸기도 한다. 하나님이 불변하다고 해서 고정된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생각을 바꾼 경우도 많이 나타난다.(출 32:14, 왕하 20:1∼11)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는 우리의 행위를 보시면서 하나님의 응답이 더 크고 원대하게 발전할 수도 있고, 더 선한 것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혹은 우리에게 더 인내를 요구하실 수도 있다. 하나님의 계획을 고정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 속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김동건 교수 <영남신대 조직신학, 저자연락은 페이스북 facebook.com/dkkim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