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흥우] 두 진보당

입력 2013-09-05 17:36

보수 야당 민주당 창당(1955년) 과정에서 배제된 죽산(竹山) 조봉암 등 혁신계 인사들이 1956년 11월 10일 서울 명동 시공관(市公館·현 명동예술극장)에 모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창당대회를 갖고 한국 정당사 최초의 진보정당이라 할 수 있는 진보당의 공식 출범을 알렸다. 진보당은 죽산을 위원장으로, 후에 전두환·노태우정권 밑에서 국가보위입법의원과 민정당 대표위원 등을 지낸 윤길중을 간사장으로 선출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죽산은 창당 개회사에서 한국의 진보를 이렇게 정의했다.

당시 정치 상황은 사사오입개헌으로 영구집권 발판을 마련한 이승만의 자유당에 맞서 강력한 단일야당 결성이 요구되던 때였다. 그러나 민주당 창당 주역들은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의 급서로 죽산이 사실상 야권후보가 됐음에도 “이승만의 영구집권은 지원할지언정 조봉암을 지원할 수 없다”며 혁신계와의 연대를 끝내 거부했다. 죽산은 이 선거에서 216만여 표를 획득, 504만여 표를 얻은 이승만을 긴장시켰다.

조선공산당 창당 주역으로 공산주의자였던 죽산은 광복 후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당을 비판하면서 결별을 선언한다. 그럼에도 빨강 꼬리표는 계속 따라다녀 결국엔 ‘사법살인’의 빌미가 되고 만다. 북진통일이 국시이던 시절, 죽산은 평화통일을 얘기했다. 이승만정권은 유엔 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평화통일을 주창했던 그를 간첩으로 몰아 교수대에 세웠다. 그리고 진보당은 창당 1년 3개월여 만에 강제 해체된다.

53년 후 진보당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나라와 세계 진보 운동의 이상과 역사적 성과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겠다며 창당한 통합진보당이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이 계승하려는 게 죽산 정신이 아닌 조선노동당 정신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북한의 모든 행위는 다 애국적이고 남한은 다 반역”이라는 녹취록에 나타난 이석기 의원의 발언을 보면 그렇다.

이 의원은 “체포동의안 처리는 진보정치에 대한 체포동의안”, “한국의 민주주의 시계는 멈췄다”고 강변했다. 착각도 이쯤 되면 중증이다. 이 의원의 사이비 진보놀음 때문에 멈춘 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한국 진보의 시계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