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의구] 통합진보당의 이상한 해명
입력 2013-09-05 17:36
“번복과 모호한 설명으론 재판 앞서 신뢰가 추락하는 수렁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과 진보당은 주목할 만한 여러 발언들을 남겼다. 혐의를 부인하거나 해명하려는 목적이었지만 궤변에 가까워 오히려 스스로를 베는 칼이 됐다.
지난달 30일 이 의원은 기자회견을 했다. 의원 사무실이 압수수색당하고 자신의 조직 회합 녹취록이 공개되자 해명에 나선 것이다. 그는 ‘RO’라는 비밀조직 회합에서 전쟁 대비를 지시했다는 혐의와 관련해 “오는 전쟁을 맞받아치자고 했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민족의 공멸을 맞기 전 하루라도 빨리 평화를 실현하자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이상한 해명이다. 대한민국의 여느 아들딸이라면 조국을 지키려 입대하겠다거나 결사항전의 결기를 다지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공멸을 막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평화를 실현하자고 했다니. 듣기에 따라서는 북한을 도와 조기에 전쟁을 끝내는 게 상책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전쟁에서 빨리 이겨야 희생자를 줄일 수 있으니 핵이나 화학무기를 쓰는 게 타당하다는 주장이 광의의 인도주의나 반전주의 범주에 들어가는지 의문이다. 하지만 조속히 평화를 실현한다면서 총칼을 준비해 적이 아닌 우리 내부에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뭐라고 표현하더라도 이적행위일 뿐이다.
‘오는 전쟁을 맞받아치자’는 말에도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대항해서 싸우자는 뜻 같으면서도 전쟁에 호응하자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이런 모호한 말로 전쟁에 대비하자던 회합의 취지를 설명하는 것은 해명이 아니라 오히려 시인에 가깝다.
이 의원은 체포동의안 처리 직후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왜 내란음모를 합니까?”라며 “이 나라가 너무 좋아서 지리산 산자락만 봐도 가슴이 설레는데…”라고 말했다. 지리산이야 명산이고 어떤 산을 좋아하든 개인의 취향이다. 하지만 녹취록을 대하고 놀란 상상력은 한강도 있고 한라, 설악도 있는데 왜 유독 빨치산을 떠올리게 하는 지리산인가라는 의문을 일으킨다.
이 의원의 해명성 발언들이 통상적인 피의자들과 달리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은 그가 ‘뼛속까지 평화주의’가 아니라 뼛속까지 종북주의이기 때문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조직 수장으로서의 책임감이나 오랜 운동 경력에서 나온 강한 자존심 때문에 북한 추종을 전면 부인하는 장삼이사를 따라할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수사의 직접적 대상자인 이 의원은 그렇다 치더라도 진보당이 보인 태도도 이해하기 어렵다. 당초 RO 회합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다 녹취록이 나온 뒤에는 정당 활동이었으며 총, 칼 같은 발언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더니 체포동의안 처리 직전에는 다시 말을 바꿨다. 이정희 대표는 “실제로 토론 때 이 말을 한 사람은 ‘농담으로 한 말인데 발표자가 마치 진담인 것처럼 발표했다’고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혜화전화국, 분당전화국을 거론하고 장난감 총기를 살상용으로 개조하는 실행 방법까지 논의하면서 농담이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 의원 스스로도 “총 구하고 다니지 마시라, 칼 가지고 다니지 마시라는 당부의 말이 총기 지시로 왜곡됐다”고 해명했다. 당부를 하지 않으면 조직원들이 총이나 칼을 갖고 다닌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진보당이 번복하고 설득력 떨어지는 해명을 내놓는 것은 이 의원에게 철저히 동조하거나 휘둘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재판에서 혐의를 다투기도 전에 신뢰에 치명상을 입게 된다. 큰 사안이 터지면 연루 의혹을 받는 의원을 당과 분리하고 때로 당 대표가 사퇴하는 게 일반적인 대응이다. 새누리당만 보더라도 중앙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건 때 최구식 의원이 그랬고, 논문 표절 문제로 문대성 의원이 그랬다. 술자리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강용석 의원은 출당됐다. 그것이 유권자에 대한 예의고 대한민국 공당으로서 책임 있는 태도다. 그래야 최소한의 신뢰는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