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시절 억눌린 삶 눈물의 구술

입력 2013-09-05 17:27


속삭이는 사회(전2권)/ 올랜도 파이지스/교양인

1980년대 중반, 소련 모스크바에 연구차 머물고 있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올랜도 파이지스는 현지에서 사귄 친구의 어머니 옥사나로부터 1920∼1930년대의 가족사에 대해 듣게 된다. 하지만 스탈린 통치시기에 이르자 옥사나는 잔뜩 긴장한 채 더 이상의 구술을 포기하고 만다. 구술사를 통해 소비에트 억압 체제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그의 프로젝트는 소련 몰락 이후인 2002년에야 실천에 옮겨졌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80세였다.

193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볼셰비키 중간 간부급의 딸은 말했다. “어른들이 속삭이는 것을 엿듣거나 몰래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우리는 그 내용을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심지어 어른들의 대화를 우리가 들었다는 사실을 어른들이 아는 것만으로도 곤경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때때로 어른들은 무슨 말을 하고는 우리에게 ‘벽에도 귀가 달려 있지’, ‘입조심해’ 같은 말을 하곤 했습니다.”(1권 27쪽)

백작부인이었던 베라 오를로바의 딸은 공산주의 사회의 축소판인 공동 아파트에 대해 진술한다. “공동생활은 끔찍했다. 거주자들은 복도와 공동 공간면적을 죄다 빈틈없이 정확히 측정하고 어머니가 약간의 귀중한 가구를 그곳에 두었다고 항의했다. 이웃들은 우리가 얼마나 욕실에 있었는지 시간을 쟀다.”(1권 303쪽)

소련 도시에서 가장 흔한 주거 유형은 공동 아파트(콤무날카)였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는 1930년대 중반, 주민의 4분의 3이 공동 아파트에 살아야 했고,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엄청난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주거 면적은 최악의 경우 1평 이하 수준까지 떨어졌다. 레닌그라드의 한 공동 아파트에서는 48명이 변기 하나를 같이 쓰기도 했다. 소비에트 당국은 이렇게 생활공간을 옥죄면서 사람들에게 이웃의 대화를 엿듣고 밀고하라고 독려했다. 저자는 1000여 명의 구술을 통해 소비에트 시절, 그들의 영혼마저 얼어붙게 한 독재와 억압의 심리적 기제를 구술을 통해 밝혀낸다.

이 책의 가치는 소비에트 체제 70여 년 동안 침묵이 삶의 방식이 된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목소리를 부여했다는 점에 있다. 스탈린 체제를 답습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억압된 내면을 보는 것 같다. 김남섭 옮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