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세대 눈높이로 쓴 ‘잉여사회 보고서’
입력 2013-09-05 18:18
잉여사회/최태섭/웅진지식하우스
2007년 우석훈 경제학 박사가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20대에게 ‘88만원 세대’란 이름을 붙이면서 청춘 담론에 불이 붙었다.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20대 문제에 사회적 관심이 쏟아졌지만 여전히 현실은 달라진 게 거의 없다.
2년 전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를 통해 ‘하고 싶은 일을 하니 참으라’며 청년 노동에 대한 새로운 착취 행태를 분석했던 저자 최태섭(30)이 지금의 현실을 그들의 시선과 언어로 다시 분석한다. 그는 20대, 이른바 청춘의 문제를 세대 담론을 뛰어넘어 현대 자본주의가 존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잉여 세력’의 분석 틀로 풀이한다.
극심한 청년 실업으로 대표되는 20대의 문제는 이들이 어떤 정치적 권력도 행사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한계에 봉착했다. 무엇보다 노년층 빈곤율, 저출산 고령화, 비정규직 문제 등 다른 계층의 문제점과 맞물리면서 결국 ‘너희만 징징거리지 마라’는 식으로 치부됐고 20대의 무기력함은 더욱 커졌다.
저자는 세대 대신 ‘잉여’란 개념을 도입하며 ‘더 이상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 유용하지 않은 것’으로 팔 수도, 노동을 시킬 수도 없고 소비자로도 부족한 존재를 통칭하는 것이라고 소개한다. 젊지만 쓸모없는 백수뿐만 아니라 빈곤층과 이주 노동자, 청년 실업자 등 사회적 유용성을 스스로 입증하지 못한 존재들이 모두 포함된다. 이들은 체제 존속을 위해 ‘좀비 또는 유령’ 같이 쓸모없는, 그렇다고 죽지도 못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저자는 “이런 잉여들의 움직임이 가장 활발하게 드러나는 곳은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점에 주목한다. 현실 사회에서 ‘쓸모 없는 것’으로 취급받는 이들이 자신의 성별, 계급, 출신, 현재 상태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공간에서 존재감을 보여주기 위해 벌이는 다양한 문화 행태를 분석한다. ‘병맛(병신 같은 맛) 웹툰’에 열광하고 성별을 위장해 ‘후로게이’를 자처하며 ‘키보드 워리어’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파헤친다.
최근 여성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민주화’란 단어를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에서 쓰는 비하적 의미로 사용해 논란이 됐는데, ‘일베’에 대한 분석이 흥미롭다. 저자는 “일베는 잉여가 갖고 있는 가능성이 가장 부정적인 방식으로 치닫고 있는 예시”라면서 이들이 박탈감을 느끼는 민주화세력, 여성, 외국인을 향해 쏟아내는 피해의식의 발현 양상을 조목조목 보여준다.
현실에 대한 면밀한 통찰이 ‘그래도 잘 살아남아, 기성세대의 전철을 밟지 말고 잘 성장해 진정한 만남을 통해 대안을 찾자’는 다소 맥빠지는 결론을 상쇄하고 남는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