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마저도 빌려 쓰는 것 아닐까요”… 공광규 시집 ‘담장을 허물다’
입력 2013-09-05 18:11
집착을 버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더욱 더 힘든 일이다. 잘 살고 못살고, 넓고 좁고, 많고 적고의 양가적 가치는 타자라는 비교 대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일종의 욕망이기에.
공광규(53·사진)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담장을 허물다’(창비)는 ‘허물다’라는 동사가 말해주듯 양가적 가치의 경계를 지우는 일에서 서정의 시심을 발동시킨다.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중략)//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담장을 허물다’ 부분)
소유의 경계를 규정짓는 담장을 허물고 나니 큰 고을의 영주가 됐다는 시인. 그 고을은 영토의 개념이 아니다. 영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소유의 개념에 가깝다. 그런데 담장 혹은 벽을 허무는 데도 나름의 방법이 있다고 들려준 이는 마을에 사는 노인이다. 시인은 옛 집에 창을 내기 위해 벽을 허무는 중이다. 오래된 시멘트벽을 밖에서 쇠망치로 여러 번 내리쳤지만 망치만 튕겨져 나간다.
“‘벽은 안에서 밖으로 치는 것이여!’/ 지나가던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중략)// 방안에 들어가 밖으로 벽을 치자/ 망치 두세 방에 벽이 뻥 뚫렸다/ 하늘이 방 안으로 무너지고 햇살이 쏟아졌다”(‘풍경을 빌리다’ 부분)
내 안이 먼저 무너지지 않으면 바깥과 소통할 수 없다는 지혜가 담긴 시편이다. 어디 허물고, 무너뜨리는 일뿐이랴. ‘비움’도 있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들은 다 속이 비어 있다// 줄기에서 슬픈 숨소리가 흘러나와/ 피리를 만들어 불게 되었다는 갈대도 그렇고/ 시골집 뒤란에 총총히 서 있는 대나무도 그렇고// (중략)// 나도 속 빈 놈이 되어야겠다/ 속 빈 것들과 놀아야겠다”(‘속 빈 것들’ 부분)
속을 비워야 삶이 더 풍요로워진다는 ‘비움’의 철학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월파 김상용의 시 ‘남쪽으로 창을 내겠소’가 자연에 묻혀 사는 안빈낙도의 삶을 묘사한 것이라면 공광규는 자연을 다만 빌려 사는, 좀 더 넓은 의미의 공동체를 꿈꾼다. 시인은 햇살마저도 빌려 쓰는 것이라며 이렇게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아! 따뜻한 햇살의 체온 때문에/ 나는 거실에 누운 까닭을 잊고 한참이나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햇살이 쓰시려고 했던 말씀이 생각나는지라// ‘광규야, 따뜻한 사람이 되어라’”(‘햇살의 말씀’ 부분) 실내를 비추는 햇살 한 줌에서 삶의 경이로운 자각에 눈뜨는 시인의 크고 넉넉한 품이 느껴지지 않는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