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천왕봉에서 내려온다… 가을색으로 물들어가는 산청의 산과 골목길

입력 2013-09-04 17:11


약초골 산청은 가을이 아름다운 고장이다. 등고선을 그리며 산을 오르는 다랑논이 황금색으로 물들고 주먹만한 밤송이에서 알밤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하면 산청의 가을이 본격적으로 무르익기 시작한다. 지리산 자락을 채색한 오색단풍은 시나브로 천왕봉을 내려오고, 남사예담촌을 비롯한 전통마을은 빨간 홍시로 점묘화를 그린 듯하다. ‘2013 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가 열리는 경남 산청으로 가을을 찾아간다.

◇지리산둘레길=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 마을길을 씨줄날줄로 엮는 지리산 둘레길 800리(약 300㎞) 중 산청과 연계된 구간은 5코스부터 9코스까지 5구간으로 60.2㎞.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와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를 잇는 5코스(11.9㎞)는 아름다운 계곡과 함께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해 지리산 둘레길 중 가장 아름답고 슬픈 구간으로 꼽힌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6일.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은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수철리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고동재를 넘는다. 그리고 잇따라 만나는 가현마을 방곡마을 점촌마을 등에서 700여명의 양민을 학살한다. 그때의 아픔은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에 고스란히 기록돼 도보여행객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금서면 수철마을에서 어천마을을 연결하는 6코스 13.6㎞는 경호강변을 따라 걷는 길. 여름철에는 굽이치는 물결을 따라 래프팅을 즐기거나 은어를 낚는 풍경이 계속된다. 특히 가을철 아침에는 경호강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해 둘레꾼들이 가장 선호하는 코스.

어천마을에서 단성면 운리를 잇는 7코스 11.3㎞는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웅석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해발 700m 지점에 위치한 웅석산 하부헬기장을 오른다. 산청의 지리산 둘레길 중 가장 험한 구간이지만 호젓해 걷기에 좋다.

운리와 시천면 사리를 잇는 13.1㎞ 길이의 8코스는 덕천강 상류에 위치한 백운계곡과 좁지만 고즈넉한 산길로 이루어져 있다. 늦가을에는 낙엽이 융단처럼 깔려 있어 걷는 재미가 잔뜩 묻어난다. 사리와 하동군 옥종면 위태리를 연결하는 9코스 10.3㎞는 산천재와 덕천서원 등 남명 조식의 유적을 지나는 길이다. 늦가을에는 집집마다 덕장에서 곶감 말리는 풍경이 이채롭다.

◇남사예담촌=돌담과 토담이 아름다운 남사예담촌은 고즈넉한 담장 너머로 한옥의 단아함과 시골 사람들의 넉넉한 정이 넘쳐나는 전통마을이다. 구불구불한 곡선이 아름다운 돌담길에 들어서면 마을 역사와 함께한 고목들이 옛 정취를 더한다.

지리산 천왕봉이 뒷동산인 남사예담촌은 박씨, 이씨, 정씨, 최씨, 하씨, 강씨 등으로 이루어진 집성촌으로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여느 마을과 달리 남사예담촌의 가을은 골목길에서 무르익는다. 경남의 하회마을로 불리는 남사예담촌의 상징은 지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돌담과 토담.

3.2㎞에 이르는 돌담길 안팎에는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고목을 비롯해 봉선화, 맨드라미, 백일홍 등 온갖 꽃들이 피어 옛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특히 이씨고가 골목길을 수문장처럼 막아선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 두 그루는 줄기가 휘어 X자로 보이는 기이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남사예담촌의 골목길 중 으뜸은 맨드라미 등 소박하면서도 청초한 가을꽃으로 단장한 최씨고가의 골목길. 투박한 질감을 자랑하는 골목은 정확하게 ‘ㄱ’자로 꺾여 모서리에 바싹 붙으면 골목이 두 개로 보인다. 최씨고가의 솟을대문 속에는 수령 230년의 최씨매를 비롯해 철따라 피고 지는 온갖 화초들이 수목원을 방불케 한다.

사양정사로 이어지는 골목은 투박한 질감과 부드러운 곡선이 돋보인다. 감이 떨어져 뒹구는 골목은 정씨 집안의 문중회의 장소로 쓰였던 사양정사의 솟을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사양정사 앞에는 퇴락한 하씨고택의 돌담 너머로 수령 700년이 넘은 감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문정공 하연(1376∼1453)이 7세 때 어머니를 생각하며 심은 감나무로 오랜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먹만한 감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산청=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