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이야기, 비슷한 배경… 재미없는 TV 사극
입력 2013-09-04 17:11
조선의 명의 허준을 이야기할 때 대중은 배우 전광렬(53)을 떠올린다. 1999년 방영됐던 MBC 드라마 ‘허준’ 때문이다. ‘대장금’(2003·MBC)의 이영애(42)와 ‘뿌리 깊은 나무’(2011·SBS)의 한석규(49)는 사극을 통해 연기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대세 여배우로 성장한 문근영(26)과 문채원(27)은 각각 ‘바람의 화원’(2008·SBS)과 ‘공주의 남자(2011·KBS)’로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김수현(25)을 스타덤에 올린 것도 퓨전 사극 ‘해를 품은 달’(2012·MBC)이었다.
작품성 있는 드라마로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렸던 사극. 매년 연말 연기대상 후보 1순위로 꼽혔던 사극의 주연배우들. 그런데 최근 대중들의 뇌리에선 사극이 사라졌다. 방영작은 많아졌지만 히트작을 찾기 어렵고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비판도 받는다. 인지도와 연기력을 갖춘 톱스타를 주연으로 내세워도 효과는 미미하다. 시청률 보증수표로 불리던 사극이 고전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1년간 평균 시청률 20% 넘은 사극 ‘0’편=현재 방영되고 있는 ‘칼과 꽃’(KBS2) ‘구암 허준’ ‘불의 여신 정이’(이상 MBC)는 모두 10% 이하의 저조한 성적을 거두며 연명하고 있다.
본보가 시청률 조사기관 TNmS의 자료를 토대로 지난해 8월부터 최근 1년간 방영한 사극의 평균 시청률을 비교한 결과 흥행 마지노선인 시청률 20%의 벽을 넘은 작품은 없었다.
‘마의’(MBC)가 평균 시청률 17.3%로 1위를 기록했지만 영화와 뮤지컬 무대만 고집하던 배우 조승우(33)가 처음 출연한 드라마인데다 ‘사극의 거장’ 이병훈(69) 감독 작품임을 감안하면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2, 3위는 각각 평균 15.1%, 14.3%를 기록한 이승기(26)·수지(19) 주연의 ‘구가의 서’(MBC)와 이준기(31)·신민아(29) 주연의 ‘아랑사또전’(MBC)이었다.
‘허준’이 최고 시청률 64.2%에 평균 53%, ‘대장금’이 평균 41.6%, ‘해를 품은 달’이 평균 32.9%였던 것과 비교하면 ‘사극의 시대’가 갔다는 얘기가 나올 법하다.
◇문제는 진부한 구성과 소재, 반복되는 배경=전문가들은 사극의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 이유로 진부한 구성을 꼽는다. 드라마 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학과 교수는 “역사적 사건 하나, 인물 한 명 만으로 시청자를 끌어들이려는 작전은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며 “뻔한 캐릭터와 구성, 비슷한 직업과 배경까지 등장하면서 시청자들이 사극에 싫증을 느끼고 있다”고 꼬집었다.
‘구암 허준’의 경우 99년 드라마 ‘허준’과 같은 배경과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달라진 부분을 찾기 어렵고, ‘불의 여신 정이’는 천재적 재능을 지닌 여주인공이 시련과 역경을 헤치고 꿈을 이룬다는 줄거리로 ‘대장금’과 ‘동이’에서 봤던 구성과 똑같다. ‘신의’(SBS) ‘마의’(MBC) ‘천명’(KBS2) ‘구암 허준’은 모두 의술을 소재로 했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SBS)의 경우 김태희(33)가 장희빈 계보에 9번째로 이름을 올렸지만 평균 시청률은 9.7%에 그쳤다.
정석희 드라마 평론가는 “비슷한 배경의 드라마가 많이 제작되면서 집중도가 떨어진다”며 “현재 방영 중인 ‘구암 허준’과 ‘불의 여신 정의’는 배경이 조선 중기 선조와 광해군 시대로 같아 헷갈리고, 같은 배역의 연기만 비교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시청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지금까지의 사극과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중·장년층 선호도 달라지고 완성도는 떨어져=시청자 선호도와 제작 환경이 변화한 요인도 언급됐다.
정 평론가는 “50∼60대가 사극의 주 시청자라는 것은 옛말”이라며 “세대별 시청률 순위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고정 시청층으로 염두에 두고 제작하면 실패하기 쉽다”고 말했다. 윤 교수도 “사극에 주로 출연해왔던 중년 배우들이 현대극으로 넘어와 수준 높은 연기력을 보이면서 오히려 현대극에서 중년 캐릭터가 돋보이고 인기를 끄는 추세”라고 해석했다.
이강현 KBS 드라마 국장은 “사극은 PPL(간접광고) 등으로 지원이 어려운 반면 의상, 소품, 미술 등에서 비용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같은 세트를 돌려쓰거나 촬영 일수를 줄여야 하는 문제가 완성도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김미나 기자 min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