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북한發 감각의 제국

입력 2013-09-04 17:35


지난달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옛 애인으로 알려진 보천보 전자악단 소속 가수 현송월과 은하수 관현악단 악장 문경진 등 북한 예술인 10여명이 포르노물 제작 및 판매 혐의로 총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이 지난 6월 ‘성 녹화물을 보지 말 것에 대하여’라는 지시를 내린 지 석 달도 안 돼 공개 처형된 것이다. 은하수·왕재산·모란봉 등 주요 예술단원이 지켜본 이들의 처형에는 기관총이 사용됐고, 이들의 가족은 모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으며, 처형된 예술가는 모두 정치범으로 규정됐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 문경진은 북한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2005년 러시아 차이콥스키 명칭 모스크바국립음악대학에서 수학하는 동안 한국 유학생들과도 안면이 있는 32세의 젊고 유망한 음악가이다. 모스크바국제콩쿠르 2등 입상, 헝가리 카네티 국제바이올린콩쿠르 우승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지닌 그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발돋움하기 직전 명운이 갈린 것이다. 함께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은하수악단 차석 바이올리니스트 정선영 역시 2012년 7월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25세 때인 2004년 ‘2·16예술상’ 제14차 경연에서 2등을 차지했다고 하니 역시 유망한 젊은 예술가였음은 물론이다.

모스크바와 파리에서 열린 문경진의 연주회를 직접 찾아간 한국 유학생들은 그를 인상 좋고 미소도 잘 짓는 훈남으로 기억한다. 처형 소식이 전해진 직후 그가 연주한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가 페이스북에 올라와 있는 걸 보면 그의 연주를 좋아한 국내 클래식 팬들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은하수 관현악단은 2012년 3월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의 지휘로 프랑스 파리 개선문 인근 살 플레옐 무대에서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와 협연함으로써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당시 문경진이 “거리가 아름답고 고전 건물이 많다. 프랑스는 아름다운 나라”라고 소감을 밝히던 장면을 지상파 TV의 녹화 방송으로 지켜보면서 문득, 헤밍웨이의 에세이 ‘파리에서 보낸 7년’이 떠올랐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스물두 살의 문학청년 헤밍웨이가 비를 맞으며 생미셸 광장 안에 있는 한 카페에 들어와 젖은 옷과 모자를 걸어놓고 재킷에 든 노트를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의 느낌을 문경진도 파리에서 받았음직하다. 헤밍웨이는 이렇게 썼다. “만약 당신이 젊은이로서 살아보게 될 행운이 있다면, 파리는 이동하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당신 곁에 머무를 것입니다.”(‘파리에서 보낸 7년’)

유럽 무대에 이름을 알린 문경진이 포르노를 찍고 동영상을 유포한 사건에 연루됐다는 게 쉽사리 믿어지지 않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떠올리게 되는 건 일본의 영화감독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이다. 알다시피 ‘감각의 제국’은 1936년 한 여인이 정부(情夫)를 살해한 뒤 그의 성기를 절단해 소지한 채 4일간 거리를 방황하다 경찰에 체포된 실화가 바탕이 됐다. 군국주의가 팽배해 있는 일본 사회는 이 사건으로 벌컥 뒤집히고 만다. 군국주의에 맞선 육체의 쾌락과 격정이 대중의 시선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군국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한 개인을 엄습할 때 그 개인은 자신이 의심해온 사회의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극단적인 도피를 감행하게 된다. ‘감각의 제국’의 역설은 제국도 감각에 의해 무너진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처형당한 북한의 젊은 예술가들도 단지 쾌락 추구만이 관심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이 처형사건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북한 사회에도 ‘감각의 제국’이 풍미하기 시작했다는 징후가 아닐까. 사건의 본질은 부자 세습으로 이어져오는 왜곡된 사회주의적 폐쇄성의 틈새에서 개인의 감각들이 신음을 내기 시작한 데 있을지도 모른다. 김정은이 ‘성 녹화물을 보지 말 것에 대하여’라는 지시를 내린 자체가 이미 북한 사회에 감각의 제국이 작동했다는 증좌일 수 있다. 아무리 완강한 제국이라도 감각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