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배병우] 오바마, 신뢰의 위기
						입력 2013-09-03 17:53  
					
				지난달 28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40분 이상을 기다려 워싱턴DC 링컨기념관 앞 행사장으로 들어섰다.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내게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연설 50주년 기념식장이었다.
거기서도 3시간 가까이 기다려서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을 들을 수 있었다. 바로 옆 접이식 간이의자에 앉아 있던 흑인 할아버지는 오바마가 입장하자 선 채로 계속 연설을 들었다.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의 ‘귀중한’ 말을 앉아서는 결코 들을 수 없다는 듯이.
하지만 기자의 느낌은 ‘이건 아니잖아’였다. 오바마의 그날 연설도 강력했다. 특유의 반복되는 구절과 보석 같은 명문이 이어졌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차를 빌려 타거나 심지어 걸어서 워싱턴에 온 행진 참가자들의 사연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그들의 ‘행동’이 일으킨 변화가 얼마나 심대한지도 감동적으로 상기시켰다. 악화되고 있는 흑인과 백인 간 소득과 부의 격차 등 경제적 불평등이 킹 목사의 꿈을 미완으로 남게 한다며 미국이 당면한 인종 문제의 본질도 꼭 집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해법은 공허했다. 상대에 대한 공감(empathy)의 불씨를 되살리고, 같은 운명이라는 동지애를 키우자는 것이었다. 이 구절을 들으며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의 직분을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명연설가나 설교가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한국에서 어떤 정치인을 ‘나토(NATO)’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여기서 나토는 북대서양조약기구가 아니라 ‘No Action Talk Only’의 첫 자를 따서 만든 조어로 ‘말만 많을 뿐 행동이 없다’를 의미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나토 정치인’의 부류로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최근 오바마 대통령은 뉴욕주의 대학을 돌며 치솟는 대학 등록금을 잡기 위해 대학 학비 등급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대학생들이 재학기간에 지출하는 총 비용을 기준으로 대학의 등급을 매기고 이를 연방정부의 학자금지원제도(FSA)와 연계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WP)의 한 칼럼니스트는 이것이 현실화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순진한 사람이라고 썼다.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이 입법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의식한 때문인지 당시 대학생들과의 대화에서 오바마도 의회를 거치지 않고 행정명령으로 시행하는 방안을 찾아보겠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이처럼 대통령의 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데는 정치적 이해타산과 보수 이념에 매몰돼 오바마의 국정 의제를 철저히 막고 있는 공화당에 1차적 책임이 있다. 하지만 정치적 반대파로부터 국정 협조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서툴거나 아예 소통 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오바마의 잘못이 크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하원의 경제 관련 상임위 소속 공화당 중진 의원은 재정 위기가 지속되고 있지만 이와 관련해 대통령으로부터 전화 한 통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주 시리아 아사드 정권의 화학무기 사용이 확실하다면서도 의회에 군사공격 결정권을 넘긴 것도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추락시킬 공산이 크다. 현재 예상대로 의회가 시리아 군사제재 동의안을 부결시킬 경우 화학무기 사용이 넘을 수 없는 ‘금지선’이라고 경고해 온 오바마는 물론 미국의 입지도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 대통령의 신뢰의 위기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도 불길한 소식이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