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용신] 그리움, 연고를 발라주던 시간

입력 2013-09-03 17:54


자녀에게 그리운 엄마가 되고 싶다고 한 선배가 말한 적이 있다. 엄마를 생각하면서 자녀가 느끼는 감정이 그리움이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모든 엄마가 다 그리운 거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그 말이 좀 슬프게 들렸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리움이라면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는 부재의 현실이 이 정서의 밑바탕에 깔려 있으니까.

내 곁을 떠난 모든 존재들이 다 그리움의 대상인가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놀랍게도 애달프게 그리워하는 순간은, 그러니까 다시 되돌아가서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그 순간은 일생에서 가장 극적이고 아름답고 대단했던 순간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운 메이 아줌마’라는 책에 보면, 오브 아저씨가 메이 아줌마를 기억하며 들려주는 이야기는 열두 살 꼬마 주인공 서머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저씨가 갖고 싶어 했던 대패 톱을 아줌마가 사준 일이 아니었다. 서머가 수두에 걸려 심하게 앓을 때 32시간 뜬눈으로 간호한 일도 아니었다. 아저씨가 가장 그리워한 것은 자신의 아픈 무릎을 아줌마가 저녁마다 연고로 문질러주던 시간이었다.

공부하러 타국에 간 남편이 그리워 펑펑 눈물을 쏟던 사건은, 어린 아들의 장난감에 건전지를 교환해주던 순간에 일어났다. 드라이버로 배터리 함의 나사를 돌리려던 그 순간에. 하나도 대단치 않은 건전지 교환을 해주던 남편이 사무치게 그리워서 당황했었다.

내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경주 수학여행 이야기를 하다가 토함산 일출, 석굴암과 불국사의 위엄, 벚꽃 흐드러진 거리를 제압하는 추억의 단어 하나를 만났으니, 바로 ‘안동장 여관’이었다. 많은 유적지를 뒤로하고 가장 큰 그리움을 불러일으킨 곳은 파란 기와지붕의 ‘안동장 여관’이라는 한 청취자의 문자.

그 문자를 받고 내가 머문 곳이 서울장이었는지, 안동장이었는지 기억은 가물거리지만 여관 앞마당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친구 노래에 맞춰 박수를 쳤던 기억과 햇살을 받은 마당 시멘트 바닥이 무척 뜨끈했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풋풋한 소녀들의 웃음이 떨어지던 뜨끈한 시멘트 바닥의 온기가 그리웠다.

눈부시게 푸른 날이 많아 그리운 이를 그리워할 일도 많은 가을이다. 소소한 그리움의 순간이 많이 떠오르는 날들이었으면 좋겠다. 엄마는 그리움의 대상일 수 있지만 그래도 그리움으로 불러내고 싶은 순간을 많이 만들어 두는 것이 선배가 그토록 원하던 그리운 엄마가 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김용신 (CBS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