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병권] 호방함의 미학
입력 2013-09-03 17:41
“정치에 웅혼함이 없어지니 국민들의 삶의 질이 갈수록 떨어질 수밖에…”
호방(豪放)이란 기상이 끓어 넘치는 원시적 미학이다. 원래 사람의 성질과 태도를 가리키는 말 아닌가. 남자답다 또는 시원시원하다는 의미로 쓰이고, 그 사람은 호걸 같다 때로는 호탕하다는 말을 할 때도 사용한다. 안대회 교수의 ‘궁극의 시학’에 나오는 뜻풀이다. 원래는 시의 품격을 논하는 ‘이십사시품(시품)’의 열두 번째 품격이 바로 이 호방이다.
한때 우리나라를 쥐락펴락하며 이끌었던 전직 대통령이 징벌에 따른 추징금을 내지 않고 수년간 미적미적하며 시간을 끌어 국민들의 원성을 산 지 오래다. 가족회의를 열어 수백억원대 재산가인 아들딸들이 나눠 낼 듯한 모습도 보였지만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 같다. 재임 중이나 퇴임 후에나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다니는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당당함의 실종이다.
유난히도 더웠던 이번 여름 시내 한가운데 천막을 치고 앉아 이런저런 주장을 거듭하며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는 야당 대표의 모습도 초라했다. 부정 의혹을 씻은 듯이 해소하지 못한 대선 승리자에 대한 분노와 원한을 태양 아래서 녹이는 심정은 이해 못할 바 아니다. 그렇지만 원래 일터인 의회를 버려두고 길바닥에 나가 앉는 것은 제발 멈춰줬으면 좋겠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 야당은 자신들의 주의나 주장을 활기차게 펴지 않고 상대방의 실수를 꼬투리 잡아 붙잡고 늘어지는 작은 정치에 길들여진 듯하다. 비판과 반대가 야당의 임무인 동시에 권리이기도 하지만 이제 시대가 변했다. 선거에서 졌으면 깨끗이 승복하고 다음 선거에서 이기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국민들의 마음을 되가져올 생각은 하지 않고 반대를 위한 반대가 습관화되고 상습화된 느낌이다.
그렇다고 권력의 핵심인 대통령이 ‘해볼 테면 해보라’라고 비칠 수도 있는 태도로 야당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모습도 국민들이 보기에는 마땅찮다. 정치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량과 포용은 가진 사람의 전유물인데 어디에서도 이런 미덕을 찾을 길이 없다. 두 사람이 만나든 세 사람이 만나든 형식이 무슨 큰 장애가 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미 역사의 인물이 된 마당에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야당 수장의 요구를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옛 선인들은 이처럼 하지 않았다. 특히 출사한 선비들은 정치를 하면서도 여유가 넘쳐흘렀다. 정조시대 명신인 남인의 지도자 채제공은 노론의 김종수와 쌍벽을 이뤘다. 두 사람은 정적이었지만 모두 품위가 있었다. 두 사람의 일화 한 토막. 어린 시절 김종수의 시가 어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큰 안개가 남산을 집어삼켰다(大霧食南山)는 내용으로 어린아이 시 치고는 자못 호방했다. 이 소문을 들은 어린 채제공은 그 시를 이렇게 바꿔 버렸다고 한다. (안개가)다시 토해 남산이 되었네(復吐爲南山). 노론과 남인을 대표하는 선비들의 통이 이 정도였다.
이처럼 선비들에게 시품 풍격(風格)의 하나인 호방은 단지 예술의 소재나 미학 개념으로만 활용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생이 지향해야 할 지점을 가리켰다. 호방을 지향하는 삶을 인생에서 구현하고자 했음은 물론이며, 시에서나 철학에서도 이를 생활화하기에 힘썼다. 그러기에 시품을 이해하지 않고는 동양의 예술과 정서를 논하기 힘들다고 하지 않았는가. 정치하는 사람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도대체 정치에 웅혼(雄渾)함이 말라버리고 없으니 국민들의 삶이 팍팍하지 않나. 정치가 제 자리를 찾아 여유와 아량이 넘칠 때는 언제쯤일까.
어느덧 매미소리는 오간 데 없고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소슬하게 불고 있다. 그러고 보니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도 바짝 다가왔다. 도시로 흩어졌던 가족 친지들이 다시 고향에 모여 그동안 못 나눴던 정을 나누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정겹다. 한때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다 떨쳐 버리고 부모 형제자매의 품에 안겨 편안한 휴식이 되었으면 좋겠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