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혜훈 (2) “주일엔 돈 쓰지마라”… 버스 안타고 걸어서 교회

입력 2013-09-02 17:23


우리 집안에서 처음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분은 외증조할머니셨다. 외증조할머니는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측인 경남 마산 제4문창교회의 집사였는데 무남독녀였던 외할머니가 역시 무남독녀인 어머니만 낳고 일찍 타계해서 우리 가족은 외증조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어머니는 위로 딸만 넷을 낳고 첫째와 띠동갑인 아들을 막내로 얻었다. 손이 귀한 집안의 막내로 아들이 태어났으니 우리 집은 모든 게 남동생 위주였다. 무심코 강보에 싸여 있던 남동생의 머리맡을 지나갔다가 ‘계집애가 감히 남자아이 머리맡을 지나간다’며 혼났던 기억이 있다.

언니와 두 여동생까지 우리 네 자매는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그리 어려운 살림은 아니었지만 시골이라 호화로운 살림도 아니었는데 피아노를 가르친 것은 교회 반주자로 준비시키려는 어머니의 뜻이었다. 피아노 치는 것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혹독하게 연습을 시키셨다. 고된 연습에 힘들어 입이 나올 만하면 어머니는 “살다 보면 개척교회를 섬길 수도 있는데, 교인이 셋만 있어도 그중에 주의 종과 반주자는 꼭 있어야 한다”면서 “언제 어디서든 반주할 수 있게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남동생은 고된 피아노 연습에서 열외였다. 자칭 페미니스트였던 어머니도 ‘성가대 반주는 여자만 한다’는 고정관념, 시대적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는구나 하며 속으로 씁쓸해했다.

어머니는 안식일에는 절대 돈을 쓰면 안 된다는 원칙이 확고하셔서 주일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갈 때는 버스를 타지 않고 먼 길을 걸어 다녔다. 네 자매가 나란히 걸어가며 찬송가를 불렀는데 당시만 해도 비포장이었던 길을 차가 한번 지나가면 바로 앞 사람도 안 보일 정도로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먼지 때문에 입안이 까칠해질 정도였지만 큰 소리로 찬송하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집에 와서도 언니 동생과 피아노를 연탄곡으로 치며 하루 종일 찬송가를 부르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어떤 날은 찬송가 600곡을 거의 다 부른 적도 있었다.

우리 자매는 이때의 행복했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영국 레스터대학에 근무하던 시절, 넷째 여동생이 어학연수를 왔을 때는 찬송을 부르다 밤을 새기도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동생과 함께 키보드를 치며 어릴 때 부르던 찬송을 생각나는 대로 찾아 불렀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부르다보니 하얗게 동이 터왔다.

이제는 김해와 대구, 서울로 뿔뿔이 흩어져 살지만 어머니 기일, 아버지 생신, 명절 등에 모이면 우리 자매는 그때 불렀던 찬송을 같이 부르곤 한다. 어떤 곡들은 악보를 구할 수 없어 아쉬운 대로 그냥 아카펠라로 부른다.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나는 주의 화원에 어린 백합꽃이니…’ ‘양들아 양들아 어린 양들아 저 앞에 진주문을 바라보아라…’ 등등.

옛날 어른들이 사용하시던 찬송가는 악보 없이 가사만 적혀 있었는데, 외증조할머니는 가사가 다른 찬송가를 모두 같은 곡으로 부르셨다. 그중에서도 평생 즐겨 부르신 곡이 찬송가 384장(통434) ‘나의 갈 길 다가도록’이었는데, 어머니도 이 곡을 참 좋아하셨다. 그래서 지금도 기일에 어머니 산소에 가면 손자 손녀들까지 온 가족이 다함께 ‘나의 갈 길 다가도록’을 꼭 부른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까지 ‘나의 갈 길 다가도록’을 부르는 게 어울리지 않는 것도 같고, 절대음감 제로의 음치 가족이기도 하지만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 믿는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