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 D의 공포] 은행 이탈 예금, 주식·부동산으로도 유입 안됐다

입력 2013-09-02 05:14


가계 재정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징후가 금융권 전반에서 포착되고 있다. 은행예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게 대표적이다. 은행권에서 흘러나온 예금은 주식시장으로도, 부동산으로도 흘러가지 않았다. 금융권에서는 가계의 ‘디레버리징(부채축소)’이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다.

1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7월부터 지난 6월까지 국내은행의 정기예금 잔액은 20조원 가까이 줄어들었다. 정기예금 잔액은 지난해 하반기 9조2000억원이 감소한 데 이어 올해 상반기에는 9조9000억원이 더 줄어들었다.

신규 예·적금 계좌 수도 지속적으로 줄어 감소율이 15%에 육박한다. 그나마 이는 세제혜택을 앞세운 재형저축 출시 덕을 본 수치다. 재형저축 출시에 따라 신규계좌는 지난 3월 약 246만개까지 늘어났다. 따라서 재형저축 출시가 없었더라면 예·적금 신규계좌의 감소율은 20%를 넘었을 것으로 은행권은 추정하고 있다.

그 많던 예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난해부터 계속된 예·적금의 이탈에 증권가는 연초만 하더라도 “은행권으로부터 ‘머니 무브(Money Move·예금 등 안전자산에서 주식투자금 등 위험자산으로 돈이 옮겨가는 현상)’가 일어날 것”이라고 단언했었다. 세법개정으로 올해부터 금융종합소득과세 기준이자수익이 하향 조정되고, 새로운 과세 대상이 된 ‘5억원 이상의 예금’들이 을지로를 떠나 여의도로 흘러올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기대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은행을 떠난 자금은 주식시장으로도, 부동산시장 주변으로도 오지 않았다.

오히려 주식시장에서는 자금이 빠져나갔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지난 7월까지 개인 투자자는 유가증권시장에서 총 14조9187억원어치의 주식을 처분했다. 개인투자자가 주식시장을 떠나는 현상은 월별 거래대금에서도 입증된다. 개인의 월별 거래대금은 같은 기간 57조1941억원에서 40조9485억원으로 급감했다.

직접투자 시장에서 거의 15조원이 사라지는 동안, 증시 주변자금(대기자금)인 CMA(종합자산관리계좌)와 MMF(머니마켓펀드) 등의 자금도 늘어나지 않았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CMA 계좌 수는 1123만개에서 1066만개로 오히려 줄었고, 계좌 잔액은 35조원 수준이 유지되고 있었다. MMF 투자 잔액은 17조9283억원에서 19조6033억원으로 1조5000억여원 소폭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을지로에서도 여의도에서도 자금이 사라지자, 금융권은 한국 경제의 디레버리징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예·적금과 증시자금의 동시 이탈은 미국과 일본에서 보인 디레버리징의 전조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하나금융연구소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 부동산 버블 붕괴로 민간부문의 디레버리징이 시작된 일본은 2002∼2006년 통화·예금보유잔액이 감소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도 현금과 예금보유잔액이 줄었다.

디레버리징은 완만히 진행되는 경우 건전성 강화에 도움이 된다. 가계부채 관리에 여념이 없는 금융당국이 염두에 둔 국면 역시 이러한 완만한 디레버리징이다. 하지만 디레버리징이 급격한 경우에는 ‘디레버리징의 역설’이 발생한다. 부동산 경기를 불신하는 이들이 모두 투자를 줄이고 빚 갚기에만 나서면서, 경기회복의 발목을 잡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디플레이션(불황 속 물가 하락)이다.

이경원 박은애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