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손수호]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

입력 2013-09-01 19:14


예전부터 그가 궁금했다. 신문이 전하는 1단짜리 작은 기사 속에 맥락이 비슷한 행위가 반복되는데도 본격 인터뷰나 기고문이 없었다. 대학에 도서관과 기숙사를 지어주고, 지방 학교에 체육관과 강당을 기증했다. 이런 혜택을 받은 학교가 백수십 군데다. 어려운 동남아 국가에 끊임없이 칠판과 전자오르간 등 교재를 전했다. 좀 특별하지 않은가.

부영그룹 이중근 회장의 이야기다. 주택건설업을 주력으로 하는 기업인이면서도 이토록 교육에 관심을 쏟는 이유는 뭘까. 일면식도 없는 이 기업인의 행적을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최근에야 내막을 알아냈다. 자신의 아호를 딴 출판사 ‘우정문고’를 설립하고 처음으로 낸 책에 대답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지난주에 나에게 배달된 책의 제목은 ‘6·25 전쟁 1129일’이었고, 엮은이가 바로 이 회장이었다. 편저자를 소개하는 난에 ‘교육에 대한 투자가 미래에 대한 가장 값진 투자’라는 취지의 글귀가 보였다. 그게 다였다. 학연이나 지연을 넘어 전국 각지에 ‘우정학사’를 짓는 이유는 이처럼 평범하되 분명했다.

책 내용도 다르지 않았다. 70대 노인들이 더러 그러하듯 “상기하자, 6·25!”를 소리 높여 외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1950년 그날 새벽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까지 날씨와 전황,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담담하게 엮어 놓았다.

기록의 전범 보여준 이중근 회장

가장 놀라운 건 날씨 항목이었다. 기상은 종군기자 수첩에 상념의 재료로 쓰이는 것을 봤지만 여기서는 처절한 팩트였다. 이를테면 일본에서 뜬 미국 전투기의 체공시간이 30분이었으니 날씨는 작전을 수행하는 데 치명적 변수가 된다. 공군력을 갖지 못한 중공군 지휘관 펑떠화이(彭德懷)가 “미국 비행기는 정말 무섭다”고 술회할 정도였으니 더할 나위 없겠다.

책은 날씨처럼 전쟁을 구성하는 사실의 적시에 승부를 걸고 있었다. 모든 걸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 건조한 편년체로 기술했다. 유엔 16개국이 우리나라만 일방적으로 도운 줄 알았더니 루마니아 체코 동독 등 4개국은 북한을 위해 참전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남침과 북진의 공방은 지도로 재현했다.

집짓기와 비즈니스에 바쁜 기업인이 왜 이런 ‘한가한’ 일을 했을까. 1200쪽이 넘는 책을 찬찬히 읽으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줄기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역사정신’이었다. 전후세대의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역사를 사실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 역시 교육에 대한 투자가 가장 값지다는 인식의 연장선이었을 것이다.

책으로 사회공헌하는 틀 만들길

그래서 그는 6·25를 체험한 세대로서 ‘반공’이나 ‘승리’와 같은 구호가 아니라 기록을 남기는 데 돈과 열정을 쏟았다. 지금 나라를 흔들고 있는 종북 국회의원의 어리석은 소동이나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일부 해외 학자들의 왜곡된 시선도 역사의 실체를 모른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이 영어와 중국어 등 많은 외국어로 번역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 표지에 무리지어 핀 해바라기의 모습이 사뭇 애틋하다. 해바라기의 꽃말은 ‘그리움’ 혹은 ‘기다림’이니, 남북이 사랑으로 만나는 원앙처럼 조국통일을 열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38선은 ‘고정선’이었지만 휴전선은 ‘유동선’이고 이게 언젠가 새로운 ‘출발선’이 될 수 있다는 그의 관점에서 보면 해바라기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으로 여겨진다.

이 회장은 출판사 설립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인문학 서적을 많이 내고 싶다고 했다. 좋은 책을 출판하는 것은 학교에 도서관을 지어주는 것만큼 중요하다. 우정문고의 도서목록이 두꺼워지기를 바란다. 그만큼 우리 문화가 풍성해지고, 사회에 공헌하는 기업의 새로운 모델로 빛날 것이다.

손수호 객원 논설위원·인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