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위대한 무기를 제대로 사용하고 싶다면
입력 2013-09-01 16:52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과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 이 둘이 피할 수 없는 외길에서 서로 부딪혀야 할 때가 있다. 거북하고 부담스러운 만남이다. 만약 우리 인생에 이런 거북한 만남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살 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는 이 부담스러운 순간이 심심찮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 인생이란 바로 이 부담스러운 부딪힘의 연속이 아닐까? 이 때문에 우리 인생은 버거운 것이 아닌가?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최인호의 소설 ‘상도’에 보면 임상옥이 스승을 떠날 때 스승은 떠나는 제자에게 “장차 인생에서 위기를 만날 때 결정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제자의 손에 마치 무기와 같은 비책을 쥐어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날 시간이 가까이 왔을 때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비슷한 말씀을 하신다. 당신의 제자들이 만나게 될 이 세상의 형편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주신 비책이 있다. 그 비책을 말씀하시려고 입을 여실 때, 그때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온 비유가 바로 ‘불의한 재판관 앞에서 간청하는 과부’의 비유다. 그가 주신 위대한 무기는 기도다. 가장 익숙한 것 속에 가장 신비한 것이 있다고 했던가. 기도, 자체를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을 써먹는 것이 문제다. 이게 진짜 어려운 거다. 그가 위대한 무기를 주셨다는 것을 알고 기억하는 것은 어쩌면 쉽다. 정작 어려운 것은 문제 상황에서 사용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나는 종종 교인들에게 우문(愚問)을 던진다. 기도의 양과 질 중에 어느 쪽이 중요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이라고 말한다. 그때 나는 힘주어서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양이라고. 우문임을 알면서도 양을 강조하는 이유는, 자신의 짧은 기도시간을 ‘기도의 질’로 멋지게 포장하려는 얄미운 현대인들 때문이다. “기도 얼마나 하십니까?” “순간순간 늘 기도하면서 살지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기도 많이 하는 사람 못 봤다.
무수한 기도의 양이 질을 보장한다. 위기의 순간에 질 높은 ‘엑기스 기도’가 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양이 쌓여야 한다. 압살롬을 피해 도망치는 위급한 순간, 다윗이 하나님께 올린 화살기도가 명중한 것은 단지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드린 메가톤급 기도는 수많은 양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양이 질을 압도한다. 도예(陶藝) 수업시간에 실제 실험한 자료가 있다. 한쪽 그룹은 작품의 양으로만 평가하고 다른 쪽은 질로만 평가했다. 이상한 일이 생겼다. 가장 훌륭한 작품은 양으로 평가받은 집단에서 나왔다. 양이 쌓여야 질적인 변화가 나오는 것이다. 복음전도자 위글스워스가 말했다. “나는 한번 기도할 때 30분 이상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 다음이 중요하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30분 이상 가본 적이 없습니다.” 위대한 기도의 무기를 적재적소에 사용하고 싶다면 기도의 양으로 승부하라.
<서울 내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