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독일의 ‘제3 정당’들이 살아 가는 법
입력 2013-09-01 17:26
한국 정치는 양당제 구도다. 오랫동안 보수와 진보를 대변하는 2개의 거대 정당 속에서 제3정당은 출현과 사멸을 반복해 왔다. 수없이 겉옷만 갈아입은 진보 정당들이 그러했고, 문국현의 창조한국당도 같은 수순을 밟았다. 모두 한자리수 지지율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의미 있는 정치세력화에 실패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뿌리깊은 이념 대립과 영호남 지역구도 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 현 정치권에선 ‘안철수신당’이 제3 정치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을지 시험대에 올라 있다.
반면 독일 정당들은 안정적인 다당제 형태다. 과반 지지를 받는 절대다수당이 없고, 의회 내 각 정당이 고루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중도보수의 기독교민주당·기독교사회당(CDU·CSU) 연합과 중도진보의 사회민주당(SPD)이 정권을 번갈아 잡은 가운데 제3 정당인 자유민주당(FDP)이 이들과 연정을 이루는 3당 구도였다. 그러다 1980년 녹색당이 등장했고, 2000년 이후 양대 정당의 지지율이 추락하면서 좌파당까지 출현, 지금의 ‘5당 체제’를 이뤘다. 최근에는 정보화시대에 발맞춘 해적당이 부상했었다. 독일에서 제3 정당의 성공은 특정 노선에 쏠리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택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있다.
자유민주당 페테르 블레히슈미트 대변인
독일 정치사에서 최장 기간(42년) 정권에 참여한 자유민주당(FDP)은 명실상부한 제3정당이다. 2009년 총선에서는 역대 최고 득표율인 14.6%를 얻었고, 기독교민주당·기독교사회당(CDU·CSU) 연합과 연정을 이뤘다. 16개주(州) 중 헤센, 니더작센 등 9곳에서도 연정파트너다.
중도 성향으로 신자유주의와 친기업적 시장경제체제를 추구한다. 하지만 감세 등을 둘러싸고 CDU·CSU 연합과 이견을 보이며 지지율은 5% 밑으로 떨어졌다. 페테르 블레히슈미트 대변인은 베를린 라인하르트슈트라세에 위치한 당사인 토마스델러하우스에서 기자와 만나 “9월 총선에서도 FDP는 연정파트너가 될 것이고, 야당으로 전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양당제인 한국·미국과 달리 독일에서 다당제가 가능한 이유는.
“독일 사회는 두 개의 블록으로 구분할 수 없다. 여러 계층이 있기 때문에 예를 들면 진보와 보수, 부자와 가난한 사람 이렇게 나누지는 않는다. 저항 세력도 다양했고, 이에 따라 정당 스펙트럼도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당이 사라지면서 3개 정당이 정착됐고, 지금은 5개로 늘었다. 또 다른 요구가 생기면 다른 색의 정당도 출현할 것이다.”
-9월 총선을 앞두고 당 상황은 어떤가.
“지난 총선 이후 계속 하락세인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정치권은 현 연정과 사회민주당(SPD)·녹색당·좌파당 연정 등 두 가지 판도의 갈림길에 있다.”
-지금의 연정을 이어가려면 지지율을 높여야 할 텐데.
“민주주의란 유권자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선거 공약을 통해서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특히 우선순위로는 유럽 재정위기와 맞물려 정부 긴축재정을 관철시키는 것이다. 남는 부분은 국민에게 돌려주는 식이다. 다시 말해 SPD, 녹색당이 주장하는 고소득자 증세를 저지하는 것이다.”
-FDP와의 연정을 원하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지원 사격은.
“자신이 속한 정당이 있는데 남의 당을 뽑으라곤 안한다. 그러나 연방의회에 진출하는 의원 수가 결정되는 정당투표에서는 지지 캠페인을 할 수도 있다. 대놓고 공개적으론 못하지만 CDU·CSU가 전략적으로 FDP를 미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제3정당의 입지를 이어가기 위한 방안은.
“정치무관심증을 극복해야 한다. 당원이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는 사람이야 정치를 떠날 수 있겠으나 결국엔 우리 정치인들은 진실되게 소신껏 정치하는 게 가장 큰 해법 아니겠나.”
녹색당 옌스 알트호프 대변인
녹색당은 1979년 환경보호, 반전평화, 인권 등의 기치를 내걸고 창당됐다. 1982년 헨센주(州) 등에서 자유민주당(FDP)을 꺾고 제3정당의 입지를 굳혔으나 통일 문제를 등한시하면서 1990년 통독 이후 유권자로부터 외면당했다. 1998년 사회민주당(SPD)과의 적·록연정을 꾸려 ‘제2의 도약기’를 맞았고, 지금까지도 당원 수가 꾸준히 늘어가는 유일한 당이다.
그러나 민생과 동떨어진 환경 이슈에 몰두해 여전히 위기란 평가도 받고 있다. 베를린 플라츠포어뎀노이엔토어 1번지의 중앙당사에서 옌스 알트호프 대변인을 만나 당내 사정을 들었다.
-현재 당 상황은.
“16개주(州) 중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총리를 비롯해 6곳에 녹색당이 진출해 있다. 여론조사에서 당 지지율도 15%까지 오르고 있다. 하지만 연방의회에 진출한 의원 숫자에서는 좌파당에도 밀린다.”
-전세계 녹색당 중에 가장 성공했다는 평가다. 그 배경은.
“에너지 전환이나 여성 할당제, 이민자 등 미래나 소수차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진지한 태도 때문이다. 또한 당원들이 참여하는 풀뿌리 민주주의 요소를 갖춘 당이다. 독일 정치권에서도 가장 정직하고, 가장 높은 신뢰를 받아왔다. 다른 당의 경우 대표 선거 혹은 정책, 현안에 대한 결정을 할 때 전당대회나 총회를 열기 전 대략 결과 예측이 가능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과거의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흐름 속에서 함께한 운동 세력들이 만든 당이기 때문에 지도자를 무조건 따르는 당이 아니다.”
-하지만 정체기란 시각도 적지 않다.
“우리는 기존 정당들처럼 여론이 움직이는 대로 정책을 만들지 않고 ‘진짜 문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고민해 왔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해결책들이 복잡하고 어려워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공감대 형성도 잘 되지 않았다. 우리의 정책이 신문 1면을 장식하는 일도 거의 없다.”
-다른 정당들과의 차별성은.
“당 대표의 경우 연방의회 의원직을 겸직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국가에서도 봉급을 받는다. 하지만 봉사직으로 생각하고 일절 수당을 받지 않는다. 당비도 연간 소득의 1%만 걷는데, 수입이 없거나 기초생활보장 대상자는 그냥 당원 자격을 얻는다. 당직자 역시 기독교민주당(CDU)이나 사회민주당(SPD)처럼 많은 편에 속하지 않고, 기부·스폰서 내역도 모두 공개한다. 이런 기조로 우리는 소득 상위 10%의 부자증세를 9월 총선에 맞춰 강조하고 있다.”
해적당 에노 렌체 대변인
2006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독일판 ‘안철수 당’인 해적당은 지난해 5월 지지율을 14%까지 끌어올렸다. 제3세력으로 성장세를 타며 확고한 자리를 구축하는 듯했다. 현재 16개 주(州) 의회 중 베를린(15명), 베스트팔렌(20명), 자알란(4명), 홀슈타인(6명)에 진출해 있다.
특히 2009년 베를린에선 10% 가까운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개방적으로 당원을 모으다 보니 당내 잡음이 커져 신뢰도가 추락했고, 현재는 지지율 3∼4%대에 머문다. 9월 총선에서도 299명이 후보로 나서지만 연방의회 진출은 비관적이다. 베를린 한 카페에서 에노 렌체 대변인을 만났다.
-왜 해적당이 한때 인기를 얻었다고 생각하나.
“많은 사람들이 기존 정당으로는 자신들의 의견을 법안으로까지 관철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이나 일반 국민이 법안까지 영향을 미치긴 매우 어려운 구조다. 초기에는 인터넷상 저작권 문제 등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도대체 의회나 의원이 뭘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생겼고, 우리는 모든 걸 투명하게 공개하기로 했다. 선거에 나가는 후보가 되려면 20회 이상의 전당대회를 거쳐야 한다. 토론 등을 통한 이른바 ‘바비큐’ 과정이다. 신념을 모두 턴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정치에 다른 길도 있구나’란 생각을 하게 됐다.”
-당 운영은 어떻게 하나.
“현재 당원은 3만2000명이고, 당직자 개념이 아닌 자원봉사자가 500여명쯤 된다. 당연히 당사는 없고 당비는 다른 정당(500∼2000유로)과 달리 연간 48유로(약 7만2000원)다.”
-최근엔 지지율이 4%로 뚝 떨어졌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우리는 진보적 성향인데, 1년 전부터 극우파들이 득실대는 등 방해 세력들이 나타난 것이다. 전당대회 등 프로그램 공개가 원칙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들의 발언도 막지 못한다. 이에 누굴, 왜, 어떤 절차로 내보낼지 고민하고 있다.”
-제3정당으로 자리매김할 해결책은 있나.
“‘좋은 당원’을 만들어내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일단은 퇴출 규칙을 간단명료하게 만드는 중이다. 기준은 인종·성적 차별 등의 발언을 통해 ‘당에 위해를 가했는가’다. 5명의 평가위원회가 곧바로 퇴출 작업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런 작업들을 놓고 일각에서는 ‘누구나 다 참여하게 해준다더니 아니었네’란 비판을 하고 있다. 딜레마다.”
베를린=김아진 기자
■ 자문해주신 분들
▲줄리아 폰 블루멘탈 훔볼트대학 사회학과 교수 ▲토비아스 뒤노 사회민주당(SPD) 대변인 ▲페테르 블레히슈미트 자유민주당(FDP) 대변인 ▲옌스 알트호프 녹색당 대변인 ▲에노 렌체 해적당 대변인 ▲김재신 주독일 대사 ▲윤종석 주독일 한국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