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학살 90주년] “일본도로, 죽창으로… 배 부른 임신부도 무참히 살해”
입력 2013-08-30 18:00
日帝 만행 증언집 3권 日서 발간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58분 규모 7.9의 대지진이 도쿄 등 일본 관동(關東)지방을 강타, 순식간에 10만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일본 정부가 사태수습에 나섰으나 혼란이 심해져가자 국민의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조선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이 이뤄진 ‘관동대학살’의 서막이었다. 일본 군대와 경찰, 민간인들로 구성된 자경단(自警團)은 지진 다음 날인 2일부터 4일까지 도쿄, 요코하마, 지바, 가나가와 등 관동 일원에 거주하던 수천 명의 조선인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이런 일본의 만행이 어떻게 자행됐는지 보여주는 세 권의 증언 자료집이 1일 관동대학살 90주년을 앞두고 발행됐다고 마이니치신문 등이 30일 보도했다. 일본 시민단체 ‘관동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 유골을 발굴해 추도하는 모임’이 발간한 자료집에는 당시 학살 현장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이 모임은 목격자와 공립도서관에 보관된 당시 일기, 자서전, 향토자료 등을 뒤져 1990년대 후반부터 증언 자료집을 발간해 왔다. 이번에는 300여건의 증언이 추가됐다.
자료집의 증언 한 대목. “(9월) 3일 낮이었다. 다리 아래에 조선인 몇 명을 묶어 끌고 와서 자경단 사람들이 죽였다. 너무 잔인했다. 일본도로 베고 죽창으로 찌르거나 해서 죽였다. 임신해서 배가 크게 부른 여자도 찔러 죽였다. 내가 본 것으로는 30여명이 이렇게 죽었다.” “10명씩 조선인을 묶어 세워 군대가 기관총으로 쏴 죽였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은 선로 위에 늘어놓고 석유를 부어 태웠다.”
학살의 참상뿐 아니라 일본 관헌이 관동대학살에 주도적으로 관여한 사실도 자료집을 통해 드러났다. 최근 일본의 우익세력이 교과서에서 군대와 경찰이 학살에 관여했다는 기술을 삭제하려는 것이 명백한 사실 왜곡이자 은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 연구자들은 일본 관헌이 1919년 3·1독립운동 여파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조선인의 복수가 언젠가 있을 것이라는 잠재된 우려심리를 이용, 조선인 폭동 등의 유언비어를 유포했고 순식간에 집단 광기로 치달았다고 분석한다. 일본 정부의 진상은폐로 당시 몇 명의 조선인이 학살됐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6000명 정도로 통용돼 왔으나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백민정 기자 minj@kmib.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