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명장으로 살기] “젊은이들 당당하게 기술인 꿈꾸는 사회 만들어야죠”

입력 2013-08-31 04:01


[인터뷰] ‘대한민국명장회’ 최창묵 회장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인 1970년대. 당시는 ‘기술보국(技術保國)’이라는 표어가 널려있을 만큼 기술을 장려하는 풍토였다고 한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박근혜 대통령도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박 대통령은 “뛰어난 기능인들이 능력으로 평가받고 합당한 대우 속에서 당당하게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학벌이 아닌 능력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7일 대한민국 최고 숙련기술인인 대한민국명장회 최창묵 회장을 만났다. 최 회장은 “아직도 우리 사회가 기술인을 제대로 우대하지 않고 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제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기술인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어떻게 달라졌다고 느끼나.

“실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다. 선진국은 실업계·이공계 학생들이 70∼80%에 이른다. 우리는 인문계에 편중돼 있다. 판사·검사·변호사 공무원이 되기 위해 기를 쓰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다 안 되면 취직하려고 대학원 가고 유학을 간다. 놀고 있는 고급인력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이 기술을 배웠다면 생활고도 없고 실업자로 허송세월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회적 분위기가 기술인을 우대하는 풍토로 바뀌어야 한다. 아이들이 기술을 배운다고 하면 부모가 말린다. 기술을 배워서 성공할 수 있다는 롤모델이 그래서 필요하다. 대한민국명장이 그 역할을 했으면 한다. 명장이 되고 싶다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이공계 지망생이 많아져 전문가가 늘어나야 한다.”

-대한민국명장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나.

“생계가 어려운 분들은 거의 없다. 오로지 자신의 기술만을 바탕으로 수백명의 종업원을 고용하는 성공사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명장이 되면 2000만원의 일시장려금과 계속종사장려금을 연 최대 357만원 받는다. 장려금 수준을 올려야 한다. 체육인들은 올림픽 금메달 따면 평생 연금을 받을 수 있지만 명장들은 회사를 퇴직하면 계속종사장려금도 끊긴다. 회사 재직여부와 상관없이 퇴직자에게도 장려금이 지급돼야 한다. 기술 꿈나무들이 명장들을 봤을 때 ‘아 나도 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게 대우해줘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고에도 몇 차례 다녀가고 기능대회도 다녀가고 그랬다. 지금은 대통령 관심이 덜한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은 퍼스트레이디 시절 쭉 봤고, 이공계 출신이니 기대가 크다. 우리나라는 기술 발전 덕분에 세계 1위를 달리는 분야가 많다. 기술을 부르짖던 70년대 우리는 세계 꼴찌 수준이었다. 모두가 기술인들을 잊고 산다. 기술인들의 노력으로 이만큼 발전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라이프치히 기능올림픽에서 후배들이 18회 종합우승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심정이 어땠나.

“선수단이 결성되기 전부터 명장회 차원에서 응원을 많이 했다. 기능올림픽 출전 선수들에게 ‘시크릿’ 책을 사다줬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는 교훈을 주는 책이다. 다른 건 다 잊고 금메달 따낼 생각만 하라고 충고해줬다. 독일 대회에도 쫓아갔다. 첫날 출전한 선수들이 대부분 경기를 망쳤다. 선수단 전체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렇지만 실망하지 말고 정신력으로 극복하라고 조언했다. 40년 전 내가 대회에 나갔을 때도 첫 하루가 떨렸다. 그렇게 연습을 많이 해도 첫날은 굉장히 떨렸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둘째 날부터 잘하면 된다고 격려했다. 그 결과 출전한 모든 선수가 입상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맨손으로 성공을 일궈낸 비결은 무엇인가.

“기술과 집중력이다. 기술을 배우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시계수리는 작은 부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며 정밀하게 다뤄야 하는 작업이다. 강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일을 많이 하던 시절에는 한 번 앉으면 5∼6시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43년을 살다 보니 한 가지 일에 미치면 인생이 재미있고 성공도 보장된다는 걸 배웠다. 집중력은 아직도 살아있어서 뭐든지 배우면 잘 한다. 골프도 한참 칠 때는 6언더파까지 해봤다. 기능올림픽 금메달 이후 승승장구했다. 남들보다 다섯배나 많은 월급을 받았다. 20대에 자가용도 끌고 다녔고 집 3채와 땅도 많이 사들였다. 24세 때 연립주택을 지어 분양을 했다. 일이 꼬여서 미분양 관련 소송이 꼬리를 물었고 해결 과정에서 벌어놓은 재산을 모두 날렸다. 욕심이 화를 일으켰다. 그때 과한 욕심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내 길은 시계다. 이후 시계일을 계속해서 일어설 수 있었다.”

-대한민국명장회 회장으로서 바람은.

“생활하면서 느끼는 것은 크게 없지만 스스로 책임의식과 봉사정신, 남을 위한 배려 등을 생각하게 된다. 기술인의 입장에선 더 많은 사람이 명장이 됐으면 좋겠다.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 많이 나와서 더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명장이 됐다고 뭘 더 바라는 것은 없다. 공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사회봉사와 공헌활동을 하고 명장 신분에 맞는 언행도 하고 달라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조그만 것 하나라도 사회공헌에 참여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선정수 기자 js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