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던 ‘전기수’를 아시나요] “오늘 이야기는 장화·홍련∼”

입력 2013-08-31 04:01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전기수(傳奇?)’에 관한 것입니다. 전기수는 조선시대 후기, 직업적으로 소설을 읽어주던 이야기꾼입니다. 18∼19세기 ‘장화홍련전’ ‘심청전’ 등의 고전 소설이 등장하면서 조선 사회는 소설 열풍에 휩싸였어요. 하지만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았던 시절이라 책을 대신 읽어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읊조리듯, 문장에 가락을 붙여 낭독하는 이들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당시 서울 종로통 등 시전 앞을 비롯해 시골 사랑방에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사람들이 몰렸지요.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대목에서 이들이 잠시 숨을 고르면, 속이 탄 사람들이 “빨리 읽으라”며 엽전을 던져주었죠. 이를 ‘요전법’이라 하는데 이들은 이렇게 돈을 벌어먹고 살았답니다.

전기수에 대해 알려진 이야기는 이 정도예요. 얼마나 많은 전기수들이 어떻게 활약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어요. 가끔 신분이 높은 여인들에게 책을 읽어주다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기도 해서인지 전기수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대요. 이따금 옛 문헌에 당시 인기가 많았던 몇몇 전기수가 언급될 뿐이에요.

다행히 최근 작가 2명이 우리가 모르던 전기수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이를 소개하는 책을 써냈어요. 정창권 고려대 국문학 박사는 청소년용 역사책 ‘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사계절출판사)를 통해 조선시대 전기수의 삶을 소개했어요. 윤혜숙 작가는 ‘뽀이들이 온다’(사계절)에서 일제시대 무성영화와 변사의 등장으로 쇠락하는 전기수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는 소년의 모습을 소설로 풀었지요.

현재 우리가 전기수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딱 한 분 계세요. 정규헌(77)옹. 그분이 우리 시대 마지막 전기수랍니다. 서울도서관과 사계절출판사는 28일 서울도서관에서 그의 낭독 시연을 접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어요. 어린이와 시각장애인에게 책을 읽어주는 자원봉사자, 목소리 기부 활동가 등 100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습니다. 어쩌면 이들 역시 현대적인 의미의 전기수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그는 하얀 모시 한복에 정자관(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쓰던 관)을 쓰고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장화홍련전’ 중 장화와 홍련이 막 부임한 철산 부사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장면을 읽었어요. ‘넘어간다∼’ 하면서 책장을 넘기며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이런! 내가 늙어서 읽었던 걸 또 읽었네요. 젊어서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라고 말해 좌중을 웃게 만들었지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낭랑한 목소리였어요. 듣는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목소리에 빠져들었지요.

그는 “전기수가 노래하듯 읽는 건 듣는 사람들이 재미있게,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며 “누군가 읽어주는 이야기책을 통해 고진감래, 권선징악, 인과응보, 사필귀정 등 철학과 도덕을 배울 수 있었던 우리의 독특한 문화”라고 설명했어요.

그 다음 무대는 현대판 전기수들이 이어받았습니다. ‘가가멜’ 목소리로 유명한 탁원제 성우는 거의 1인 7역을 맡았어요. 그의 흥미진진한 낭독에 좌중에선 폭소와 탄성이 터져 나왔지요. 인천 강화중학교 도서관 사서인 김혜연 선생은 차분한 목소리로 책을 읽었어요. 김 선생은 “중학생들만 해도 책에 대한 이해는 둘째 치고 띄어 읽기 자체가 안 되는 경우가 많아요”라며 “아이들과 낭독 훈련을 하다보니 읽기와 듣기, 이해하는 능력이 같이 키워졌어요”라고 낭독의 힘을 강조했어요.

행사가 끝난 뒤 정규헌옹을 무대 뒤에서 만났습니다. 그는 “전기수에 관심을 가져준 것만으로도 너무 고맙다”고 했어요. 그동안 섭섭하고 아쉬웠던 마음을 토로한 뒤엔 “산에 올라가 외친 것처럼 가슴이 후련하다”고 했지요.

그는 1936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습니다. 30여 가족, 주민 200명이 사는 동네였는데 당시 한글을 아는 사람은 5명뿐이었대요. 아버지 정백섭(1963년 작고)씨로부터 이야기책 읽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가 어릴 땐 일제강점기라 일본 관리들이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감시하던 시절이었어요. 글을 읽을 줄 알고 많은 사람들과 만나는 전기수는 감시의 대상이었지요. 그의 아버지는 밤에 남몰래 어린 아들에게 이야기책을 읽어주며 글을 가르쳤습니다. 정옹은 “주재소 순사한테 들키면 큰일 나는데, 전기수라는 직업이 계승돼야 한다며 그리 하셨던 거죠.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 참 거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했어요.

그의 집에는 200여권의 고담소설이 있었는데 이제는 ‘장화홍련전’ ‘신유복전’ 등 40여권만 남았답니다. 그는 13세 때부터 이야기 장사에 나섰지만 도저히 먹고 살 벌이가 되지 않아 결국 다른 직장을 구했지요. 그가 이야기를 들려주던 때의 일이에요. 집주인이 그를 자기네 사랑방에 초청했지요. 사람들은 고구마 같은 간식거리를 싸들고 모였대요. 집주인은 밖에 요강을 세워놓고 간이 화장실을 마련했지요. 인심을 쓰면서 동시에 귀한 비료도 모으겠다는 생각이었던 거죠.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야기를 듣다가 일이 급해지면 자기 집에 가서 일을 보고 왔답니다. 그는 “지금은 똥 오줌을 치우느라 돈을 들이지만 비료가 귀하던 시절, 그땐 그게 보배였어요”라며 “우리 조상의 삶을 지금 사람들은 너무 몰라요. 그런 문화가 전달이 돼야 하는데, 똥 오줌이라고 쓸 수 없으면 배설물이라고 써서라도 꼭 좀 넣어줘요”라고 했습니다.

정옹은 퇴직한 뒤 1990년대 후반부터 전기수 알리기에 본격적으로 나섰습니다. 하지만 문맹률이 낮아지고, TV가 등장하고, 갈수록 재미있고 자극적인 놀이문화가 확산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예전 같지 않았지요. 판소리와 비슷한 강독법을 배우겠다며 찾아온 이들도 있었지만 돈이 되질 않으니 2∼3달 만에 떠나곤 했습니다. 계승자를 구할 수 없자 그는 아들을 한 달에 한 번씩 청양으로 불러들여 가르치고 있어요.

“나 혼자라도 이걸 지켜나가겠다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어려워요. 자극적인 거, 뭔가 흥미를 끌 만한 재주를 부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이질 않아요. 하다못해 기념품이라도 줘야 모이지 안 그러면 그냥 TV 보고 고스톱 치겠다고 한다니까요. 내가 지금 거리에 나가서 이거 하면 누가 관심이나 갖겠어요?”

그래서 정옹은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2008년 2월 충남 무형문화재 39호 ‘계룡 강독사’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지요. 죽기 전에 계승자를 찾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고전소설 강독을 녹음이라도 해서 남기는 게 마지막 꿈이랍니다. 얼마 전 충남 계룡시 지원을 받아 ‘홍길동전’을 녹음했는데 속이 조금 상한 듯했어요.

“난 원래 심청전을 하고 싶었는데 그러면 시디(CD)가 3장이 필요하대요. 돈이 더 드니까 2장이면 되는 홍길동전을 녹음했지. 내가 여유가 있으면 심청전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다 녹음을 하고 싶어요. 이런 것도 이렇게 궁색하게 해야 하나 슬픈 마음이 들어요. 이렇게 귀한 우리 문화가 나 죽고 나면 나랑 같이 땅 속에서 썩어버려서 되겠어요?”

그 어느 때보다 이야기와 스토리텔링, 그리고 우리 역사가 강조되는 시절이지요. 사람들과 함께 모여 누군가의 이야기를 몸으로 듣는 문화의 힘은 더욱 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전기수’가 사라지지 않도록 조금만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실래요?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