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영성] 자아성찰, 영혼 건강에 가장 좋은 길

입력 2013-08-30 17:25

인간의 가장 심각한 병은 자신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다. 철저하게 부패한 본성은 자신이 죄인임을 자주 망각하게 만든다. 매주 두 번 금식을 하며 도덕적으로 살았던 바리새인(눅 18:11∼12)에게서 보듯이 종교 행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를 보는 눈은 더 흐려질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자아성찰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에서 중요하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보고 그분의 시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영적 삶의 방으로 들어가는 열쇠

이것이 제대로 될 때 비로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자기가 더 형편없는 수준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고통스런 결점들을 직면할 때 오직 그것들을 고칠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알고 그분께로 가까이 가게 된다. 자아성찰은 풍성한 영적 삶의 방으로 들어가는 열쇠와 같다. 성찰 없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기대하는 길을 벗어나게 된다.

기독교 역사상 자아성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던 곳은 4, 5세기 이집트의 사막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테오나스가 어느 날 니트리아 사막의 한 원로 수도사를 방문했다. 대주교는 “수도생활에서 무엇이 가장 좋습니까”라고 물었다. 원로는 “나 자신을 고발하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책망하는 것입니다”고 답했다.

수도원이 자아성찰을 위해 정규적인 시간을 정해 놓았다는 것을 원로 수도사 니스테루스의 조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도사는 매일 밤과 매일 아침에 자신이 행한 일 중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고 넘긴 것이 무엇인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일생 동안 이렇게 행해야 합니다.” 이집트 수도원들은 매일 아침, 저녁 두 번의 기도 시간을 가졌는데 반성의 시간도 매일 두 차례 가졌다. 죽는 그날까지 이런 시간을 멈추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일화들이 많다.

노수도사 디오스코루스가 방에서 울고 있었다. 제자가 울음소리에 놀라 물었다. “왜 울고 계십니까.” “죄 때문에 울고 있다네.” “당신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내 아들아, 만일 내 죄를 볼 수만 있다면 서너 명이 울어도 부족할 것이다.” 그는 사람이 볼 때 흠 없는 자였으나 자신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영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를수록 자아를 보는 눈은 더 객관적이고 정확해진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난 선지자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사 6:4)이라고 진단했다. 말씀을 전하던 입술마저도 더럽다고 느낀다. 사도 바울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라고 표현했다. 성 프란시스도 자신을 ‘가장 연약하고 가장 무지하며, 가장 미련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수도사들 가운데 평생 자아성찰을 했던 사람은 아르세니우스였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에 황제 데오도시우스의 두 아들 아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 왕자의 교육을 11년간 맡았던 원로원 귀족이었다. 아르세니우스는 일생 동안 앉아서 손으로 노동하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그 눈물 때문에 그의 가슴에 도랑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푀멘은 아르세니우스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아르세니우스여 진실로 그대는 복된 사람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당신 자신을 위해 우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위해 울지 않는 사람은 이후에 영원토록 울게 될 것입니다.” 아르세니우스는 항상 죽음의 때를 보고 살았다고 한다. 눈물의 근원지는 거기에 있었다.

심판대에 선 죄인을 생각하라

어떻게 하면 ‘경건한 슬픔’을 갖고 살 수 있을까. 노수도사 암모나스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감옥에 갇혀 있는 악인들처럼 생각하시오. 그들은 항상 간수가 언제 올지 물어보며 걱정하면서 형벌을 기다립니다. 수도사 역시 항상 자기의 영혼을 비난하며 ‘나는 참으로 불쌍한 존재다. 내가 어찌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인가. 나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는 끊임없이 이렇게 행하라고 권한다. 사막의 스승들은 제자들에게 죽음의 날을, 심판대 앞에 선 죄인의 당황함을, 마지막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을, 그리고 영벌의 고통과 공포를 생각해 보라고 요구했다. 종말론적으로 사는 습관을 키워가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

김진하 <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