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의 비밀조직 ‘남의사’, 일본 파시즘 영향 더 받았다

입력 2013-08-29 22:24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티스트/정두음/선인

1930년대 중국 국민당을 이끌던 장제스(蔣介石·1887∼1975)는 강력한 민족정부를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내부 분열과 부조리한 행정, 그리고 농촌지방에 대한 지배력이 약한 나머지 이를 효과적으로 완수하지 못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실패한 장제스는 중국을 신속하게 근대화시킬 수 있는 급진적인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그것은 ‘남의사(藍依社)’라는 비밀결사로 구체화됐다.

‘남의사’는 1931년 공산당과의 협력관계에 반대하는 황푸군관학교 출신 국민당 우파들이 결성한 정보기관이자 준(準)군사조직이었다. ‘남의’는 그 무렵 중국인 남성들이 입는 가장 흔한 옷이었다. 실제로 파란 옷을 입은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고 군중 속에 섞이면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국민당 비밀요원들 역시 파란색 제복을 입고 있었기에 ‘남의사’라는 호칭을 얻게 됐다.

‘남의사’의 결성을 두고 미국의 중국현대사가 로이드 이스트만은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일 군사 자문관들로부터 자극을 받은 파시스트 조직이라고 단정한다. 다른 중국 권위자인 마리아 장은 ‘남의사’가 이탈리아 파시즘과 일부 유사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남의사’를 파시스트 단체로 규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인 정두음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IFES) 교수는 두 학자의 결론과는 다른 시각으로 ‘남의사’에 접근한다. 이 책의 논점은 일본 파시즘이 유럽 파시즘보다 더 ‘남의사’에 영향력을 끼쳤다는 데 있다. 유럽 파시즘은 ‘남의사’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기보다는 선험적인 영감만 주었을 뿐, 실제로 ‘남의사’는 일본의 파시스트 조직이자 고위 관료들이 구성원으로 있던 흑룡회와 현양사의 조직적 특성들을 차용했다는 것이다.

이는 ‘남의사’의 핵심 인물 대부분이 일본 유학파여서 이들 조직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던 데 기인한다. 여기에 보태 중국의 전통적인 씨족주의를 바탕으로 비밀조직원들 사이에 끈끈한 인간관계가 작용하고 있었기에 ‘남의사’는 단시일 내에 강력한 파시스트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