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기듯 햄버거로 뚝딱… 학원가는 아이들 ‘서글픈 저녁밥’

입력 2013-08-30 03:58 수정 2013-08-30 10:34


27일 오후 4시30분쯤 서울 대치동 학원가의 한 햄버거 가게에 주부 박모(44)씨가 아들 진모(10)군과 함께 들어섰다. 아들 가방을 대신 메고 있던 박씨는 급히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면서도 시간에 쫓기는 듯 수차례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들의 학원 수업이 시작하는 오후 5시까지는 30분도 채 안 남았다. 허겁지겁 식사를 마친 진군은 잽싸게 가방을 메고 학원으로 뛰어갔다. 박씨는 “아들이 학원 수업 시간에 맞추려면 어쩔 수 없이 샌드위치나 김밥으로 저녁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옆 테이블에는 정모(42·여)씨가 초등학교 5학년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학교가 오후 3시30분에 끝나는데 학원은 4시에 시작한다. 밥 먹을 시간이 부족해 차에서 닭꼬치나 김밥으로 때울 때가 많다”고 했다. 학부모들이 모여 학원 시간표를 꺼내놓고 수업 일정을 짜는 모습도 보였다.

인근 다른 햄버거 가게에는 교복을 입은 여중생 2명이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송파구 한 중학교에 다니는 조모(15)양은 “학교가 오후 4시 넘어 끝나는데 학원은 5시 시작이라 밥 먹을 시간이 없다”고 했다. 이모(15)양도 “가끔 학원이 끝나는 오후 9시까지 참다가 집에 가서 먹기도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리면 너무 배가 고프다”고 했다. 이들은 서로 대화도 없이 10여분 만에 식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서울 양천구 학원가의 모습도 비슷했다. 오후 5시50분쯤 신정동 학원가 골목의 한 한식당에서 초등학교 6학년 김모(12)군이 혼자서 비빔밥을 비비고 있었다. 오후 5시30분에 논술학원을 마치고 6시 수학학원 시작 전 30분 동안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김군은 “금방 씹어 넘길 수 있는 주먹밥을 주로 먹는다. 식구들과 먹는 집밥이 그립다”고 했다.

한창 자라나는 학생들이 빡빡한 학원 수업 때문에 ‘집밥’을 포기하고 있다. 학원가 주변 음식점 주인들도 이런 아이들이 안타깝다고 했다. 목동 학원가에서 비빔밥집을 운영하는 박모(26)씨는 “엄마와 아이 둘이 와서 아이 혼자만 먹는 경우가 많다”며 “엄마들은 대개 빨리 음식을 달라고 재촉하고, 아이는 다 먹지도 못한 채 학원으로 뛰어가는 모습도 자주 본다”고 말했다. 대치동 학원가의 한 분식점 종업원 이모(50·여)씨는 “주먹밥이나 라볶이 등 간편한 음식을 10분 안에 먹고 가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일부 학원에서는 수업 중간에 저녁 먹을 시간을 따로 주기도 한다. 그러나 20여분에 불과해 도시락을 먹기에도 부족하다. 학부모 정모(40·여)씨는 “도시락을 싸오는 아이들은 쉬는 시간 10분 동안 식사를 해야 한다”며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 하루에 4∼5개의 학원을 다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더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대치동의 한 수학학원 관계자는 “부모가 걱정할까봐 조금이라도 집에 빨리 보내기 위해 저녁시간을 여유 있게 주지 못한다”며 “식사를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 안쓰럽다”고 말했다.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 강재헌 교수는 “열량이 높고 나트륨과 포화지방이 가득한 식단은 아이들의 성장을 방해한다”며 “공부보다는 아이들의 건강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브레인바이오센터의 패트릭 홀포드 박사는 패스트푸드 위주였던 초등학생의 식단을 현미밥과 채소 위주의 ‘집밥’으로 바꾸자 성적이 최소 14% 올랐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