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명희] 현대판 리바이어던엔 견제 필요하다

입력 2013-08-29 17:58 수정 2013-08-29 21:50


“대기업 총수 전횡 막고 소액주주 권리 강화하기 위해선 이사회 기능 강화해야”

지난달 29일 검찰은 계열사 돈 450억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1심 구형량보다 2년 많은 징역 6년을 구형하면서 “SK공화국이 법보다 위라고 생각하는 무소불위의 현대판 리바이어던”이라고 비판했다. 검찰은 왜 재계 3위의 대기업 회장을 성경 속의 엄청난 힘을 가진 괴물에 빗댔을까. 동생이 한 일이라고 했다가 무속인이 했다고 하는 등 여러 차례 진술을 번복하면서 검찰을 우롱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을 것이고, 한상대 전 검찰총장의 힘을 빌려 1심에서 구형량을 낮췄다는 의혹이 일고 있는 마당이니 괘씸한 생각도 들었을 거다.

대기업들은 지난해 대선부터 불어닥친 경제민주화 바람과 맞물려 사법부의 변신에 당황하고 있다. 돈다발과 명품시계를 국세청장에게 갖다 바치며 세무조사를 면제받고 수천억원을 탈세한 총수가 이재현 CJ그룹 회장뿐이었던가. 최 회장이나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이 호주머니(계열사)에서 저 호주머니로 내 돈을 내 맘대로 쓴다는데 웬 간섭(배임 혐의)이냐고 억울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90년 이후 10대그룹 총수 중 7명이 총 22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형이 확정된 뒤에는 평균 9개월 만에 사면받았다는 통계가 말해주듯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오랜 관행이다 보니 서슬 퍼런 사법부가 낯설게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개중에는 아직도 꾀병을 좀 부리면서 병원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사회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면 풀려나기를 기대하는 인사도 있을 것이다. 감옥이 붐비는 게 아니라 하루 입원비가 100만원 선인 서울대병원 VIP 병실이 동났다고 하니 아이러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상법 개정안은 시스템적으로 대기업 총수의 독단적 경영을 막고 소액주주의 권리를 강화해 대기업 총수들이 범죄를 저지를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자산 2조원 이상 140여개 상장사를 대상으로 회사 경영을 감독하는 이사회와 실제 경영을 집행하는 임원을 분리하도록 의무화하고 소액주주들이 주주총회에서 자기들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표를 몰아줘 이사에 선임할 수 있도록 한 집중투표제 등을 담고 있다. 일부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다.

그동안 대기업 총수들이 회삿돈으로 수천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탈세를 저질러도 이사회는 눈 뜬 장님이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소액주주들에게 돌아왔다. 우리나라는 외환위기 때인 1998년 사외이사제를 도입했지만 15년이 됐어도 경영을 감시하기는커녕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갈 때나 세무조사를 받을 때를 대비한 ‘방패막이’ ‘거수기’에 불과하다. 그러다보니 엉뚱하게 사외이사로 검찰과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출신 인사들의 몸값이 상한가다.

박 대통령은 28일 10대그룹 총수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투자를 부탁하며 상법 개정안을 완화할 뜻을 내비쳤다. 지나친 경영 간섭으로 오히려 경영 효율을 떨어뜨리고 헤지펀드 등에 휘둘릴 수 있다는 재계의 우려도 일리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대기업 총수들의 비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상법 개정안을 전면 백지화하자는 재계 주장은 공감을 얻기 힘들다.

2000년대 초 미국 7위의 거대기업 엔론의 회계부정 사건은 경영층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와 이사회의 독립성 부족, 경영자와 회계법인 간 담합 등 밀실경영의 말로가 어떤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미국은 엔론 사태 이후 ‘사베인스-옥슬리법’을 만들어 기업 이사회가 적극적인 감시자 역할을 하고, 이를 소홀히 했을 경우 이사회에도 책임을 묻고 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엔론 파산 1주년에 즈음해 내린 결론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엔론으로부터의 진정한 교훈은 회계보고서가 ‘과학’이 아니며 경영자들은 대개의 경우 탐욕스럽다는 점을 기억하는 일이다. 투자자들이 항상 의심과 집요한 질문으로 무장해야 하는 이유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