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명희] 비즈니스 프렌들리2

입력 2013-08-26 17:50

우리 역사를 반추해볼 때 대통령과 재벌은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관계였다. 기업들은 정치자금을 대주며 사업이권을 따냈고, 대통령은 비자금을 권력유지 수단으로 활용했다. 정권에 밉보인 기업들은 수난을 겪었고 반대의 경우는 성장가도를 달렸다.

대통령과의 독대는 통치자금을 갖다 바치는 자리였다. 이 관행을 끊겠다고 선언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재벌 총수들을 청와대로 불러 칼국수를 함께하곤 했다. 1996년 1월 31일 비자금 사건 재판으로 위축된 기업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30대 그룹 총수를 청와대로 불렀을 때였다. 10여분 늦게 도착한 모 재벌 총수는 “각하, 죽을죄를 졌습니다”라고 90도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을 불렀는데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이 눈 때문에 늦는 바람에 그룹이 해체됐다는 얘기가 돌던 시절이었으니 문민정부라 해도 지각한 총수가 간담이 서늘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1월 5대 재벌 총수들을 만난 뒤 ‘재벌개혁 5+3 원칙’을 발표했다. YS정부 시절 온갖 수난을 당했던 현대는 DJ정부에선 대북사업 덕을 봤다. DJ정부는 대기업 구조조정이란 명분으로 LG반도체를 현대에게 넘겨주고, 부도난 기아자동차를 삼성 대신 현대에 안겨줬다.

서민 대통령을 자처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벌과 거리를 두려 했다. 취임 첫해인 2003년 6월 재벌 총수들과의 만남도 청와대가 아닌 청와대 인근 삼계탕 집에서 가졌다. 재벌 총수들은 비좁은 삼계탕 집에서 비질비질 땀을 흘려야 했다.

현대건설 회장 출신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선된 지 9일 만인 2007년 12월 28일 여의도 전경련 회관으로 달려갔다. 그는 21명의 재계 총수들 앞에서 “차기 정부는 비즈니스 프렌들리(Business Friendly·친기업) 정부로 만들겠다”며 “투자해 일자리를 만드는 분들이 존경받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경제민주화에 드라이브를 걸고 일부 재벌 총수들의 단죄에 치중하던 박근혜정부가 ‘비즈니스 프렌들리’로 돌아서는 모양새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투자하는 분들은 업고 다녀야 한다”고 하더니 28일 10대그룹 총수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할 예정이다. 투자에 목매는 분위기를 틈타 재계는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핵심 공약을 담은 상법 개정안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아무리 기업 투자가 절실하더라도 재벌 전횡을 막을 최소한의 장치마저 포기한다면 재벌개혁은 백년하청이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