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색무취 물방울… 그게 내 인생”… 40년 넘게 물방울 그린 ‘김창열 화업 50년’
입력 2013-08-25 17:10
‘물방울 작가’ 김창열(84) 화백에게 질문을 하니 선문답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50년 동안 작업하셨는데 어떤 작가로 남고 싶습니까?” “너절하지 않은 작가가 되고 싶어요.” “너절한 작가는 어떤 작가인가요?” “있으나 마나 하는 작가이지요.” “물방울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물방울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무색무취한 게 아무런 뜻이 없지. 그냥 투명한 물방울이에요.”
평안남도 출신으로 6·25전쟁 때 월남한 후 서울대 미대를 나온 김 화백은 1963년 서울 신문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72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그는 물방울 그림으로 전시를 가져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리고는 40년 넘게 줄곧 물방울을 그려왔다. 한 가지 그림만 그리는 것이 지겹지도 않을까. 그는 “한평생 그렇게 살아왔다. 지루하지 않도록 늘 노력한다”고 했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그의 작업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대규모 개인전 ‘김창열 화업 50년’이 29일부터 9월 25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본관과 신관에서 열린다. 지난해 11월 대만국립미술관에서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대규모 회고전을 연 바 있는 그는 이번 전시에 70년대 초부터 최근까지 작업한 물방울 작품 40여점을 선보인다. 대부분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전시를 앞두고 지난 주말 만난 작가는 물방울을 그리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70년대 파리 근교의 마구간에서 살았는데 화장실이 없어서 밖에서 물통을 만들어놓고 세수를 했어요. 어느 날 아침, 세수하려고 대야에 물을 담다 옆에 뒤집어둔 캔버스에 물방울이 튀었죠. 크고 작은 물방울이 캔버스 뒷면에 뿌려지니까 햇빛이 비쳐서 아주 찬란한 그림이 되더라고요.”
이역만리 타국에서 힘들고 어렵게 지내던 시절,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은 그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왔다. 80년대부터는 캔버스가 아닌 마대의 거친 표면에 물방울을 그렸고, 80년대 중반부터는 마대에 색과 면을 그려 넣어 동양적 정서를 살렸다. 90년대부터 천자문을 배경으로 물방울을 화면 전반에 배치한 ‘회귀’ 시리즈 작업을 최근까지 이어오고 있다.
김 화백은 지난 5월 미술관 건립을 전제로 제주도와 협약을 체결하고 작품 200점을 기증했다. 제주도는 6·25전쟁 당시 월남해 1년 정도 피란생활을 한 인연이 있다. 최근 몇 년간 건강이 악화돼 자녀들에게 작품을 물려주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가 미술관 건립을 위해 자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기증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내 작업의 전체, 내 인생의 전부를 다 내줬다”고 말했다.
손이 떨려 붓을 쥔 오른손을 왼손으로 고정한 채 작업한다는 그는 “젊었을 때와는 필력이 다르다”며 “평생 물방울을 그리면서 영혼과 닿을 수 있겠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40년 가까이 교유한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은 “작가의 젊은 시절 열정이 눈에 선하다. 자녀에게 물려줄 작품까지 미술관에 기증했다는 얘길 듣고 가슴이 먹먹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02-2287-3500).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