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볼리비아 전명진 선교사] 하나님이 주신 소명, 신학대 설립

입력 2013-08-25 17:22 수정 2013-08-25 19:24


교육부 계속 대학인가 안 내줘

미온적이던 차관 휴가

임시 대행이 온후 “통과” 기적


2001년 볼리비아에 들어왔을 때 이 나라는 확실히 전에 선교활동을 펼치던 아르헨티나보다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학구열은 아르헨티나보다 더 높았다. 일례로 아르헨티나는 청년 100명 가운데 대학생은 10명 미만에 불과했으나 볼리비아는 50% 이상의 청년들이 대학에 다녔다.



신학생들의 경우 현지 교회가 어려워 대부분 야간 신학을 다니는 형편이었다. 나는 이 나라의 교육열을 감안할 때 신학 공부도 성공할 것으로 확신했다. ‘교육열이 높기 때문에 신학교도 홍보만 잘 하면 소명을 지닌 더 많은 학생들이 와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주말반을 따로 모아 운영해 보자. 학생들에게 더 많은 장학금 혜택을 주고 신학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학생들이 몰려들 것이다. 주님, 신학생들을 모아 주십시오.’ 예상은 적중했다.

첫해 우리가 모집한 학생은 50명이었다. 등록을 받고 보니 자그마치 187명이 지원했다. 학비를 월 5달러로 책정하고 교역자나 그들의 자녀는 50% 할인해 줬다. 경제적 형편 때문에 주중에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주말반을 운영했던 것이 볼리비아 현실에 딱 맞아떨어진 것 같다.



주말이 되자 신학교는 젊은 학생들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반 사람들은 번듯한 정규대학을 다니는데 목회자들은 교육부의 인가를 받지 못한 신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신학대 설립이라는 꿈을 붙잡고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했다. 하루는 한인 성도님 가정을 심방했는데 집사님과 대화 중에 전임 최인규 목사님의 소원이 신학대를 세우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신 이유다.’



대학 설립을 위해 준비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를 시작했다. 일단 교육부에서 요청하는 서류를 모두 제출하기로 했다. 프로젝트 전문가와 계약을 맺고 1년 가까이 서류를 준비해 제출했다.



그런데 교육부에선 이런 답변이 왔다. ‘볼리비아는 단과대인 신학대만 인가를 해 주지 않습니다. 4개 과 이상이 돼야 대학을 설립할 수 있습니다.’ 다시 방향을 바꾸어 4개 과로 프로젝트를 제출했다. 서류만 20권 분량이었다. 일일이 고쳐서 내가 거주하는 산타크루스에 제출하면 그것은 다시 수도인 라파스로 올라갔다. 두 도시 간 거리는 자그마치 1000㎞가 넘는다. 문제가 있으면 또다시 내려오고 다시 수정해 올리는 과정을 여러 번 거쳤다.



정말 대학인가 문제는 사람의 피를 말리는 일이었다. 그렇게 서류가 오간 시간이 2년이나 됐다. 담당자도 수차례 바뀌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교육부에서 요구하는 서류를 대부분 구비해 제출했다.



희한한 것은 그렇게 어렵게 준비해 서류를 제출했지만 도무지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답변은 늘 똑같았다. “일단 기다리세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서류가 완벽하게 준비됐지만 인가를 기다리는 서류들이 100건 정도 밀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학교의 서류는 앞의 신청이 모두 진행된 다음에 심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그렇게 막연히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프로젝트를 준비한 사람과 함께 라파스의 교육부로 찾아갔다. 교육부 차관 면담을 요청했지만 면담이 불가 답변이 돌아왔다. 그리고 무조건 기다리라는 얘기만 들었다. 산타크루스로 오면서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주변에서는 별의 별 소리가 다 들렸다. 프로젝트를 준비한다고 많은 돈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인가도 얻지 못하는데 무슨 대학을 세운다는 거냐.’ ‘대학은 아무나 세우는 거냐.’ 정말 주님이 주신 꿈이 있었기에 참고 기다렸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던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친하다고 생각하는 지역 목사님들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주변 선교사들의 차가운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대법원장, 국회의원, 국립대 총장 등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힘을 써봤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우리 서류는 아예 따로 제쳐놓은 듯했다. 정말 할 수 있는 건 기도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5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 후보자가 점차 우세해졌다. 야당 후보인 에보 모랄레스는 사회주의 성향의 후보로 모든 기업과 학교를 국공립화하겠다는 것이 그의 공약이었다. 주변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국가와 연합을 하면서 점점 대선의 판세는 야당 쪽으로 기울어지게 됐다. 우리는 어떤 수가 있더라고 정권이 바뀌기 전에 대학 인가를 반드시 받아야 된다고 백방 노력을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야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우리의 꿈은 점차 흐려졌다. 4년이란 시간이 흐른 상황이었다. 이제는 대학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들어간 돈과 시간이 얼마인데.’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여기저기서 끌어다 쓴 돈이 꽤 컸다. 이제 그걸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까마득해졌다. 하는 일이라곤 매일매일 교육부에 전화를 걸어 대학 설립 허가 서류가 나왔냐며 담당자를 귀찮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역사하셨다. 교육부 차관이 휴가를 가고 임시 대행이 오면서 직원 일부가 바뀌었다. 학교 인가 문제로 자주 문의를 하다보니 임시 담당자가 우리 문서를 찾다가 차관이 따로 분리해 놓은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문서를 검토해보니 우리 학교는 이미 서류 심사를 통과한 상태였다.



“당신들의 대학 설립 서류가 모두 통과됐습니다. 중앙은행에 가서 학사 4개과 과정과 전문대 4개과 과정을 신설할 수 있는 금액을 넣으십시오.”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나는 귀를 의심했다. 2만 달러를 즉시 입금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차관은 휴가를 다녀온 뒤 ‘누가 이 서류를 진행시켰느냐’며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그 차관은 우리 서류가 심사를 통과했음에도 서랍에 넣어두고 흥정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일단 중앙은행에 돈이 입금되었으니 설립절차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할렐루야!

2006년 9월 인가번호 UNIBETH(universidad bethesda)가 나왔다. 대학이름은 볼리비아 베데스다대학교.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인가만 나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강의실을 준비하고 5년 안에 대학교 캠퍼스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2007년 3월 일단 우리 대학은 영산신학교 강의실을 빌려서 대학을 시작했다. 첫해 140명의 학생들이 등록을 했는데 영산신학교 학생들과 대학 학생들 간 강의실 문제로 다툼과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야, 신학교 강의실을 빌려 쓰는 주제에 뭐가 그리 잘났냐?” “정규대학도 아닌 신학교 주제에 잘 난 척하긴.” 직원들 간에도 크고 작은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또다시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렸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달려왔지만 막상 대학 인가가 난 뒤 상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회주의 정부가 새로 들어와 나라마저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대학을 운영하려면 적어도 100년은 내다봐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연세대나 이화여대처럼 초창기 대학들은 선교사들에 의해 전문학교나 학원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최고의 학교로 성장하지 않았던가. 절대 조급해하지 말자.’ 그렇게 신문에 난 부동산 매각광고를 보며 대학 부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에 확 들어오는 글자가 들어왔다.

전명진 선교사

● 전명진 선교사

-1957년생. 대한신학교, 볼리비아 순복음신학교, UNPI 졸업

-기하성 여의도순복음 소속, 1988년 2월 파송

-볼리비아 한국하나님의성회 법인 설립

-한인 및 현지인 목회자 재교육 사역, 볼리비아 영산신학교, 볼리비아 베데스다대, 고아원 운영, 인디언(과라니족) 새마을운동, 진료소 운영, 라디오 방송, 굿피플 어린이 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