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공감력이 능력이다
입력 2013-08-25 17:16
사람은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타인의 고통을 제대로 공감할 수 없다.
오래 전 ‘닥터’라는 미국 영화에 보면 한 거만한 외과의사가 나온다. 환자들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갖지 못하던 사람, 그가 갑작스러운 몸의 이상으로 병원을 찾는다. 의사가 아닌 환자로서 병원에 들어왔을 때 그는 자신을 대하는 의사와 병원 측의 태도에 놀란다. 자신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그들의 차가운 태도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암에 걸리고 나서야 그동안 환자들을 단지 병든 몸뚱이로만 보았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퓰리처상을 받은 희곡 ‘위트’에 보면 여주인공 비비안 베어링 교수가 나온다.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한 문학적 통찰력과 표현으로 이름을 날리던 50대 여교수, 그녀가 어느 날 회생 가능성이 없는 난소암 판정을 받게 된다. 죽음과 관련한 모든 문학적 현란함과 시적 통찰력을 자랑하며 책의 세계 속에 파묻혀 있던 그녀가 직접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여태껏 죽음에 대해 말했던 자신의 모든 말이 무력해지는 것을 절감한다.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의 고통을 직접 겪어보지 않고 했던 말들이 너무 무력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 없는 것, 이것이 인간의 한계다. 인간의 죄의 결과는 단절이다. 하나님과 단절된 동시에 사람과 단절되었다. 그러기에 죄인에게 나타나는 치명적인 현상은 공감력 부재의 현상이다. 사람이 가까이 있어도 외로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로 인간다운 모습을 되찾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되는 것이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인가? 공감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공감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우리에게는 외로움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완전히 공감하게 될 것이므로! 참된 인간은 공감하는 인간이다. 사람의 신앙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다른 것이 아니라 공감력이 커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놀라운 공감력을 소유하신 분은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느끼는 인간의 고통만 공감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혀 느끼지도 못하는 인간 죄성의 숨어있는 고통도 공감하셨다. 그 공감력이 표현된 절정이 십자가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공감력의 극치를 보여준다. 우리가 진정 예수 닮은 사람이 될 때 공감하는 사람이 된다. 공감력이 능력이다.
고 한경직 목사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잊지 못하는 그분의 모습이 있다. 그것은 사람과 대화할 때 상대방의 말에 수없이 장단을 맞추고 맞장구를 치며 상대방의 마음을 받아주시는 그분의 모습이다. 바로 그것이 그의 공감력이었고 그의 능력이었다.
얼마 전 남편을 잃고 상실의 고통을 당한 분의 손을 잡고서 위로를 했다. 그리고 스스로 질문했다. ‘나는 과연 이 사람의 고통을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 모두가 던져야 할 본질적인 질문이 아닌가.
<서울 내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