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서학동예술마을’을 가다] 쇠락하던 옛 동네… 문화·예술로 꽃피다

입력 2013-08-24 04:01


전주시 전주천을 사이로 한옥마을과 마주하는 서학동은 원래 ‘선생촌’으로 불렸다. 마을 안에 대학교와 초등학교가 있고 교사·학생들이 많아서였다. 시가 팽창하면서 주민들은 떠나고 활기를 잃어가는 옛 도심지역이 됐다. 그러다가 2010년부터 예술인들이 하나둘 터를 잡기 시작했다. 지금은 화가·행위예술가·사진가·자수가·색소폰연주가 등 20여명이 활동하는 어엿한 ‘예술인마을’로 변모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전북 전주시 전주교대 기숙사 옆 ‘모과나무’ 카페에 최근 한국에 연수 온 중국 대학생 20여명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실 것을 주문하고 곳곳에 설치된 미술작품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들은 선재미술관으로 이동해 이희춘(50) 화백의 그림들을 보며 작가로부터 직접 설명을 들었다. 이어 다섯 집 건너 하나 정도 자리한 공방과 갤러리 등을 둘러보며 색다른 오전을 보냈다.

쇠퇴해 가던 전주 옛 도심에 예술인들이 속속 둥지를 틀면서 전주의 또 다른 명소가 되고 있는 ‘서학동예술마을’의 모습이다.

이 마을의 출발은 이형로(49·음악가)·김저운(57·소설가)씨 부부였다. 이씨 부부는 2010년 9월 마을 중심에 있던 한옥을 고친 뒤 이사해 ‘벼리채’라는 문패를 달고 연주와 창작활동을 했다. 친분이 있던 진창윤·이경태 화백도 이씨 부부를 따라 인근에 입주했다.

이어 행위예술가 심홍재씨, 도예가 유애숙씨, 색소폰 연주가 이대성씨 등이 작업장 겸 안식처를 마련했다. 양윤선·강금란·김승진·최은혜씨 등 화가들도 이곳 주민이 됐다. 조각가 김성균씨는 작업실을 한창 짓고 있다.

이곳에서 자리 잡고 활동 중인 전체 예술인은 20여명. 나이는 20∼60대로 다양하며, 저마다 개성 있는 작업실과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올봄 ‘서학동사진관’을 연 김지연(65)씨는 전북 진안에서 사진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를 운영하며 이름을 날린 사진작가다. 김씨는 골목 안 한옥을 고쳐 전시실과 카페 등으로 꾸몄다.

‘비파채’의 소연경·소도희씨는 국악인 자매다. 대학에서 해금과 아쟁을 공부하고 있다. 최근 카페와 아틀리에를 나란히 연 양성실·양순실씨 자매는 각각 음악과 서양화를 공부했다. 30여년 교단생활을 마친 언니 성실(53)씨는 23일 “마을 분위기에 맞게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전시하고 책과 음악을 조화시키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이 서로 손을 잡아주고 이끌어주니 상생 효과는 크다. 시나브로 가족 같은 연대감도 생겼고, 누군가에게 일이 생기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 왔다.

두 달 전 75세로 타계한 ‘현대 수묵화의 거장’ 송수남 화백의 장례가 그 대표적 사례다. 이들은 송 화백의 집에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고, 발인 때 노제도 치렀다. 건넛마을 흑석골에 살던 송 화백은 이들의 ‘큰 어른’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동료이자, 첫 청중이고, 관객입니다. 서로를 도와주며 분발하고 있죠.” 지난해 이사 온 이희춘(조형미술) 화백은 “각자 치열한 작업 과정을 지켜보는 게 좋다. 긴장이 되고 자극이 된다”며 유대감에 대해 말했다.

예술인들은 주민과의 소통에도 신경을 썼다. 김장도 도와주고 명절 때는 선물도 주고받는다. ‘초록장화’ 주인 한숙(설치미술)씨는 동네 할머니들에게 퀼트(자수)를 가르치고 있다. 할머니들은 자신이 만든 작품을 팔아 용돈을 마련한다.

예술인들은 지난해부터 주민들과 힘을 합쳐 ‘거리축제’도 열고 있다. 지난 5월 잔치 때는 마을 중간에 큰 현수막을 세우고 관람석을 만들었다. 음악가들은 악기를 들고 나왔고, 작가들은 자신의 작업실을 개방했다. 모여서 먹을거리로 부침개도 마련했다.

주민들도 기꺼이 동참해 축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동서학동문화센터의 여성중창단이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서서학동 동장은 색소폰 실력을 뽐냈다. 주민 이모(48)씨는 “같은 마을에 사는 다문화 가정주부들 9명이 각각 자신의 나라 전통의상을 입고 나와 노래를 불러 큰 박수를 받았다”면서 “공연도 보고 음식도 먹고 작가들의 작업실도 꼼꼼히 둘러봤다”고 기분 좋게 회고했다.

마을은 갈수록 새로운 활기로 충만돼 가고 있다. 방문객들의 발길도 잦아지고, 전주천 건너 한옥마을과 연계되면서 ‘들여다볼 곳’이 많은 곳으로 손꼽히게 됐다. 예술인들은 주민들과 더욱 소통하면서 일상과 예술을 조화시켜 나가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전주시도 이 지역의 변신에 주목, 달포 전 안내판을 세웠다.

이 지역에서 민박을 했던 어느 네티즌은 자신의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전주여행을 계획하신다면 이 마을에 꼭 한번 들러 좋은 추억을 만들길 바랍니다.”

전주=글·사진 김용권 기자 y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