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영성] 내적 평화를 누리고 사는 법

입력 2013-08-23 17:25

중세 유럽 사회는 기도하는 수도사, 싸우는 기사, 일하는 농부 등 세 부류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 시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수도원을 좋아해 수도사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원 규칙서’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로 모여 있는 첫째 목적은 한 집에서 화목하게 살며 하나님 안에서 한마음과 한뜻이 되는 것이다(행 4:32).”

평안의 길

오랜 세월 동안 수도원의 모습은 다양했지만 오순도순 한데 모여 살며 사랑으로 하나 된 공동체를 세우려는 목적은 변함이 없었다. 모든 것을 공유했던 초기 예루살렘 교회를 자신들의 시대에 재현하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소망이었다. 그러나 처음 교회가 과부들을 구제하는 문제로 분열을 경험했듯 수도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 70년간 수도생활을 했던 사막의 한 노수도사가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고 고백한 것을 보면 그곳도 세상속의 교회나 다름이 없었다.

이집트의 스케티스 사막에서 살았던 푀멘의 일곱 형제들이 “이곳을 떠나자. 이 수도원들이 우리를 성가시게 해 영혼을 잃어버리고 있다. 울어대는 어린 아이들까지도 우리가 내적 평안을 누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불평했던 것을 보면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수도원운동이 세상에 알려지고 ‘사막이 도시가 된’ 후 수도원에는 순례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당면한 문제에 대해 기도를 받거나 자문을 구하려고 찾아왔지만 이 때문에 소란함이 항상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각종 약점을 갖고 있는 수도사들 자신에게 있었다. 성격 결함, 주벽, 탐욕, 호색, 시기, 불평, 비방하는 습관을 여전히 버리지 못한 수도사들이 공동체를 자주 흔들어 놓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설교 중에 모든 직업마다 그에 해당하는 악한 사람들이 있는데 슬프게도 수도사들 가운데도 악한들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환경 가운데 어떻게 하면 연합해 평안히 살 수 있을까? 위에서 예로든 푀멘의 형제들은 답을 찾았다. 기록에 의하면 어느 날 야만적인 도적떼가 형제들이 살던 지역에 침입해 살상을 저지르고 수도원 마을을 완전히 파괴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자 형제들은 테레누티스라는 곳을 새 정착지로 정하여 여러 날 동안 낡은 신전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 때에 맏형 아눕이 둘째 푀멘에게 “일 주일 동안 우리 서로 만나지 말고 각자 조용히 살자”고 제안했다. 그 신전 안에는 큰 석상이 하나 있었는데 아눕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면 그 석상의 얼굴을 향해 돌을 던졌고, 저녁에는 그 석상을 향해 “나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이상한 짓을 한주 내내 했다.

토요일에 형제들이 함께 모였을 때 푀멘이 아눕에게 물었다. “형은 일주일 내내 그 석상의 얼굴에 돌을 던지고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곤 했는데,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허탄한 짓을 하느냐?”고 하자 아눕은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였다. 너는 내가 그 석상의 얼굴에 돌을 던지는 것을 보았는데, 그 때 그 석상이 말을 하거나 화를 냈던가?”

아눕은 계속 말했다. “우리 칠 형제가 이곳에 있다. 만일 우리가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석상처럼 되어야 할 것이다. 석상은 우리가 때리거나 아첨을 해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이 신전에 사방으로 난 문이 있으니 각기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 흩어져 살자.”

그 말을 들은 동생들은 엎드려 아눕의 뜻을 따랐다. 그리고 형제들 중 한 사람을 정해 주방일을 맡겼는데, 어느 누구도 음식 불평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평생을 연합하면서 수도생활에 전념해 대표적인 수도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화목의 길

또 다른 일화에서는 한 수도사가 공주 수도사 니스테루스에게 시끄러운 일이 생길 때 평안히 사는 법에 대해 묻자 다음의 교훈을 남겼다. “제가 수도원에 처음 들어왔을 때, 저는 스스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너는 당나귀이다. 당나귀는 매를 맞아도 말을 하지 않고 학대를 받아도 대꾸하지 않는다. 나도 이제부터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편에서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73:22)라고 말씀하지 않느냐?” 사람 때문에 생겨나는 갈등을 겪거나 결점 있는 행동을 참아내야 한다면 화목의 길은 오직 자기를 죽이고 사는 것에 있음을 기억하자.

김진하 <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