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서천석] 시력 1.0 세상 모든 화려함이 보였고 시력 0이 되자, 하나님 말씀이 들렸죠

입력 2013-08-23 17:24 수정 2013-08-23 19:55


시각장애인 쉼터 ‘루디아의 집’ 서천석 원장

그의 시력이 1.0이었을 때. 세상에서 갖고 싶은 것을 많이 봤다. 샛노란 꽃무늬 원피스, 두툼한 월급 봉투, 신성일처럼 잘생긴 남자…. 갑자기 희귀병 베체트가 발병했다. 시력이 점점 떨어졌다. 죽으려 했다. 기도하다 죽으면 천국에라도 보내주겠지. 기도하다 하나님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너를 쓸 것이다.” 시력이 0.1로 떨어지는 동안 점자를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했다.

이후 최초의 시각장애인 교회를 설립했다. 전국 맹학교 13곳에서 기독학생회를 조직하고 장학금을 지급했다. 한글점자교본을 처음으로 썼다. 점역사 200여명을 배출했다. 시각장애인 쉼터 루디아의 집을 마련했다. 중증장애인 요양시설을 만들었다. 지난 40여년 동안 서천석(75) 루디아의 집 원장이 한 일이다, 시력이 0이 될 때까지. 하나님은 서 원장을 충분히 쓰셨다.

병은 마음으로도 고친다

서 원장이 숙명여대 국문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0년. 눈앞에 가끔 까만 점이 떠다녔다. 병명을 알 수 없었다. 병원 처방 약을 먹으면 증상이 완화되는 듯했다. 졸업 후 경남 진양군(현 진주시) 진서중 국어교사로 부임했다. 서울까지 와 약을 받기가 어려웠다. 토요일 오후 진주시내 한 안과를 찾았다. 의사는 “병원 약으로만 고치는 게 아니요. 마음으로도 고칩니다. 교회에 나가보세요”라고 말했다. 약도 주지 않고 진료비도 받지 않고 교회에 나가보라니. 서 원장은 ‘참 이상한 노인네 다 있다’며 병원을 나섰다.

그날 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자취방 근처 작은 교회에 달린 하얀 십자가가 서 원장을 따라오는 게 아닌가. 십자가에 닿으면 타버릴 것 같아 사력을 다해 뛰었다. 깨보니 꿈이었다. 잠이 오질 않았다. 이런 날이 1주일 동안 이어졌다. 다음 주일 서 원장은 교회 문을 스스로 열었다.

동생이 신문에 실린 아나운서 모집 공고를 오려 보내줬다.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62년 MBC 아나운서 공채 2기 시험에 합격했다. 서울 숭인동 집으로 돌아왔다. 불길한 일이 일어났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동안 눈앞에 떠다니던 까만 점이 매일 매일 조금씩 점점 늘어났다. 방송 원고를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하지만 생방송을 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서 원장은 방송국에 사표를 냈다.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지금까지 경찰 공무원이었던 부친의 5남매 중 차녀로 곱게 자라왔다. 하나님은 날 어디에 쓰시려는가? 한겨울 추풍령에 있는 경북 김천 용문산기도원에 들어갔다. 매일 철야기도를 했다. 예배당에서 아침이 되길 기다려 숙소로 돌아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무더운 여름, 물도 먹지 않고 기도했다. 닷새째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너는 내것이라. 나는 네 교만이 무너질 오늘까지 기다렸다. 내가 너를 통해 영광을 받을 것이다.”

내가 이만하면 좋은 직장도 갖고, 높은 월급도 받고, 근사한 남편도 얻어야 한다고. 원했던 것이 너무 많았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눈을 고쳐주면 하나님 일을 하겠다고 했던 것을 회개했다. 다른 사람이 하기 싫어하는 일, 그러나 세상에 꼭 필요한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젓가락으로 오징어땅콩 집어먹기

“어떤 분은 안질이 무슨 대단한 병이냐. 나와 결혼하면 꼭 그 병을 낫게 해주겠다며 구혼 편지를 하는 사람도 있긴 있었어요(웃음).”

산에서 내려온 뒤 바빠졌다. 68년 서울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점자를 배웠다. 71년 신대원 졸업 후 최초의 시각장애인 교회인 한국맹인교회 개척에 합류했다. 이듬해 서울 회현동 남산 3호터널 위, 셋방에서 교회를 시작했다. 100여명이 모일 때까지 꼬박 5년이 걸렸다. 한 시각장애인 부부의 딸을 입양하고 서씨로 호적에 올렸다.

서 원장은 신대원 졸업 직전 백내장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우리 학교에 놀러오세요.” 병원에서 만난 국립 서울맹학교 아이들을 매주 만나기 시작했다. 시각장애인 학원선교의 시작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 밥을 먹였다. 아이들은 깍두기, 김치, 나물 등 반찬에 숟가락을 마구 집어넣었다. 젓가락질 할 줄 아는 아이가 별로 없었다. 밥상은 매번 뒤죽박죽이었다. 서 원장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날 때 오리온 오징어땅콩 과자와 넓은 쟁반, 젓가락을 가져갔다. “과자 먹어라. 그런데 이 오징어땅콩은 젓가락으로만 먹어야 해.” 서 원장은 아이들에게 젓가락질을 가르쳤다.

기독교학생회를 조직하고 매주 월요일 강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서 원장은 76년 베리 크라프트 연합세계선교회(UWM) 소속 목사의 제안을 받았다. 처음엔 교회에 남으려 했다. “서 전도사, 맹인교회 전도사로 있으면 서울에 있는 시각장애인만 전도하지요. 그런데 우리 재단에 오면 전국의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전도할 수 있어요.” 이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합류했다. 서 원장은 선한목자재단 전신인 UWM 지원으로 18년 동안 맹학교에 다니는 시각장애인 학생들에게 3만원씩 장학금을 지급했다. 88년 당시에만 이 재단의 장학금을 받는 시각장애인이 전국 13개 맹학교 1000명에 달했다.

점자 번역실 불가 방침에 사표

서 원장은 전국 13개 맹학교를 3개월에 한번씩 순회했다. 교정시력이 0.1에 불과하던 시절. 서 원장은 돋보기 두 개를 이은 듯한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다녔다. 밤에는 혼자 다닐 수 없었다. 낮에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크라프트 목사는 서 원장이 출장을 갈 때 사무실 직원을 반드시 동행하도록 했다. 서 원장은 맹학교를 순회하는 동안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참고서 점역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당시 맹학교는 안마와 지압을 가르치는 직업학교였어요. 학생 중에는 대학에 가고 싶어하는 애들이 있었어요. 점자책이라곤 성경과 국정교과서뿐이었어요. 참고서가 없는 거예요. 크라프트 목사에게 점역실을 열자고 했어요. 그런데 허락을 안 해주는 거예요. 너무 힘든 일이라고….” 서 원장은 사표를 냈다. 10일 만에 크라프트 목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돌아오라고. 서 원장의 열정에 항복한 것이다. 점역실을 담당하라고 했다. 안과의사 한종원(81) 박사의 도움을 받아 점역 사무실을 얻었다.

83∼84년 200여명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점자 번역 교육을 실시했다. 교재도 없이 매일 교육을 하다보니 후두염이 왔다.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참 살아 계세요. 제가 말을 못하고 후두염을 치료하는 동안 한글점자교본을 썼어요. 국내 최초의 교본이었어요. 그 전에는 구전으로만 점자 번역을 가르쳤거든요.” 이후 일반인들은 그 교본에 따라 점역을 독학할 수 있게 됐다.

점역실은 학생들에게 점자 참고서를 배부했다. 대입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가뭄 속 단비였다. 1급 시각장애인인 김영일(45) 조선대 특수교육과 교수도 당시 선한목자재단 도움으로 연세대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김 교수는 93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 벤더빌트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립장애인도서관지원센터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김 교수는 종종 서 원장에게 안부 전화를 한다.

왜 소경이 남의 다리를 긁냐

서울 오금동 루디아의 집을 방문한 19일 오전. 할머니들은 아이노스 앙상블의 반주에 맞춰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매월 셋째주 월요일에 오는 봉사팀이었다. 6년째 살고 있는 박순옥(80) 할머니는 “여기 살면 아무 걱정이 없어. 조석으로 예배드리고, 찬송 부르고, 산책하고. 아주 좋아”라며 활짝 웃었다.

서 원장이 시각장애인들의 쉼터 마련을 결심한 건 70년대 중반. 전국 시각장애인 마을을 돌아다니면서다. 나이 든 시각장애인들이 의탁할 곳이 없었다. 시각장애인 양로원 설립을 위해 매월 조금씩 돈을 모았다. 89년 전세로 집을 얻고 ‘루디아의 집’이란 간판을 달았다. 그동안 시각장애인 할머니 8명이 이곳에 살다 천국으로 갔다.

“더 많은 시각장애인이 머물 수 있는 곳을 위해 기도했어요. 2000년 무렵 저는 시력을 완전히 잃었어요. 그런데 시각장애인 한 분이 조건 없이 경기도 가평의 땅 9만9000여㎡을 기증하겠다는 거예요.” 고 한영자 전도사였다. 가평 루디아의 집 터가 됐다. “한 전도사님은 아무 조건 없이 그 땅을 기증했어요. 제 간곡한 청으로 2007년 10월 개원 예배 때 온 것 외엔 오신 적도 없답니다.”

가평 루디아의 집 개원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정부 기관에 시각장애인 요양시설 설립 인가를 신청했다. 반려됐다. 기도를 했다. 시각장애인은 앞이 보이지 않는 것 외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장애인 아닌가. 중증장애인 요양시설로 신청서를 내자 인가가 났다. 가장 신뢰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했다.

서 원장은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일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우리 속담에 ‘소경이 남의 다리 긁는다’ ‘소경 남의 닭 잡아먹기’ 이런 말이 있어요. 소경이 아무리 앞을 못 봐도 가려운 자기 몸 놔두고 남의 다리를 긁겠어요. 남의 닭을 잡아먹겠어요. 비장애인의 인식 변화 중심에 목회자들이 서줬으면 좋겠어요.”

현재 가평 루디아의 집에서는 80명의 중증장애인이 생활하고 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딸 미란(42)씨도 이곳에서 일한다. 10명이 지내는 서울 루디아의 집에도 앞으로 무의탁 장애인들을 받아들일 계획이다. 외롭지 않으냐고 물었다. “아휴, 외로울 시간이 어디 있어요. 루디아의 집에 자원봉사자가 오면 오리엔테이션 해야 하고, 아침저녁으로 예배 인도해야 하고, 봉사자들과 일정 조율도 해야 하고….”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서 원장을 쓰시려나 보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