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학 작품 속 인물에 법의학 적용, 의문을 푼다

입력 2013-08-22 18:54


‘법의학이 찾아내는 그림 속 사람의 권리’ 펴낸 문국진 교수

문국진(88·사진) 고려대 명예교수는 한국 최초의 법의학자로 한국 법의학 역사의 획을 그었다. 20여년 전 현직을 떠난 뒤 법의학을 미술과 문학 작품 속 인물에게 적용하는 ‘법의탐적론(法醫探跡論)’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그간의 연구를 집대성한 신간 ‘법의학이 찾아내는 그림 속 사람의 권리’(예경)를 발간한 문 교수를 22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힘이 있었다. 답변은 간결하면서도 명쾌했다. 단단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이름부터 생소한 법의탐적론이 무엇인지 물었다.

“법의학은 죽은 이의 시신 부검 등을 통해 결국 인간의 권리를 다루는 학문이에요. 예술작품 속 인물이라도 혹시 자신이 누려야 할 권리를 침해받고 있다면 그 역시 되찾아줘야 한다고 생각을 했죠. 정신분석학에서 그림이나 문학 작품 분석을 통해 창작 당시 예술가들의 심리 상태를 분석하는 ‘병적학(病跡學)’을 보면서 법의학으로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책에서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다.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그림 ‘옷을 벗은 마하’와 ‘옷을 입은 마하’의 모델이 누구인지를 놓고 200년 동안 스페인 문화예술계를 달궜던 데 대해 그는 생체정보분석 기법을 통해 명쾌한 답을 내놨다. 당시 고야와 사랑에 빠졌던 알바 공작부인이 아니라 당시 재상 마누엘 고도이의 애인 페피타 츠도우라는 것이다.

“10년 전 스페인 마드리드에 가서 그 작품을 보고 흥미를 갖게 됐어요. 일단 한 번 생각이 들면 계속 관련된 정보들을 찾아나갔죠. 직접 미술관을 가서 브로셔를 수집하고, 관련 문헌과 자료를 찾는 문헌 검색으로 ‘문건부검’을 한 거예요. 생체정보분석 기법을 통해 밝혀낸 이 연구 결과는 다음 달쯤 대한민국학술원에서 영문 보고서로 발표도 할 겁니다.”

그는 또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을 통해 그가 독주 ‘압생트’에 중독돼 ‘황시증(黃視症)’을 앓았음을 분석한다. 사물을 보면 찬란한 빛깔이 보이다 깨면 사라지는 이 증세 때문에 고흐는 강렬한 노란색을 그림에 많이 썼고, 대표적으로 ‘꽃병에 꽂힌 열다섯 송이 해바라기’ 등의 작품을 그리게 됐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전혀 새로운 분야다. 그는 “법의학 전공자들은 미술에 관심이 없고, 법의탐적론에 대해서도 좋지 않게 생각을 한다”며 주변 반응이 썩 좋지 않다는 분위기를 내비쳤다. 그는 “그래도 나처럼 미친 사람이 계속 나와야 해요”라며 “법의학 자체가 예술과 문화가 발달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에서 발달할 수 있는 학문이니, 젊은 법의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새로운 분야로 키워 나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책을 출간한 출판사에서는 이번이 그의 마지막 저서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이번 책은 그간 그가 펴낸 법의탐적학 시리즈의 완결편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다음 저서나 활동 계획을 물었다. “내 나이가 이제 아흔이 다 됐수”하며 껄껄 웃는 소리가 돌아왔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